|
 |
|
| ⓒ 경북문화신문 |
|
해설 : 귀록 조현명선생은 이춘제의 정자가 북악산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니 계곡은 그윽하고 깊으며 면계는 좌우로 트여있고 고송이 빽빽하다. 그 중에 층을 지어 계단을 삼고 꽃과 대나무를 벌려 심었으며, 구덩이를 파 못을 만들고 마름과 가시연을 놓았다. 위치가 깊고 정연하여 신묘한 운치가 있으니, 북악산 일대에 대게 명원승림이 많으나 이춘제의 정자가 그 빼어남을 독차지 하였다고 말하고, 하루는 이춘제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이 정자가 이루어진 것이 마침 내 49세가 되니 그런고로 혹 '사구정'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 또 '세심대'가 있고 '옥류동'의 사이이니 그런고로 혹 '세옥정'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도 하는데, 그대가 연구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 "40의 잘못을 아는 것이 비록 군자가 덕을 닦아 나아가야 할 바 이기는 하나 이 정자에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적절치 않고, 또 옥류동과 세심대는 돌아보면 곧 족한데 그것을 이름으로 중복하는 것은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니 내가 일찍이 그대의 정자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이병연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아들여 주인이 되었다." 하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릇 이태백 · 두보의 시와 고개지 · 육탐미의 그림은 천하에 이름이 났으나 그 출생한 것이 각각 떨어져서 앞뒤로 달리 하여 동시에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였기에, 비록 향로봉의 폭포, 동정호의 누각에 시는 있되 그림은 없었으니 이는 천고승지의 한이었습니다. 지금 이병연, 정선씨의 시와 그림은 다 같이 가히 일세에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곳이 모두 그대의 정자에서 멀지 않습니다. 무릇 이 정자의 빼어남으로 또 다행히 두 분께서 인접하여 매일 지팡이를 들고 짚신을 신고 서로 한 자리에 오갈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이태백과 두보를 왼편에 두고 고개지와 육탐미를 우측에 둔 것과 같으니 그 얼마나 존엄 합니까. 계산에 끼는 안개구름이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는 모습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으로부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에 이르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시와 그림 속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는데, 시가 형용할 수 없는 바는 혹 그림이 형용하는 것에 있고 그림이 발현하지 못하는 바의 것은 혹 시가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 있기에 대게 서로 더불어 꼭 필요하여 없을 수 없습니다. 이에 정자의 빼어난 것이 사천과 겸재를 만나 삼승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고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승정'이라 하고 마침내 이를 위하여 기를 짓는다고 기록하였다.
-이춘제의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
이춘제(李春躋)의 '서원(西園)'의 정자가 북산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니, 계곡은 그윽하고 깊으며, 면계는 좌우로 트여있고 고송이 빽빽하다. 곧 그 중에 층을 지어 계단을 삼고 꽃과 대나무를 벌려 심었으며, 구덩이를 파 못을 만들고 마름과 가시연을 놓았다. 위치가 깊고 정연하여 신묘한 운치가 있으니, 북산 일대에 대게 명원승림이 많으나 이춘제의 정자가 그 빼어남을 독차지 하였다.
하루는 이춘제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이 정자가 이루어진 것이 마침 내 50세(만49세)가 되니 그런고로 혹 '사구정(四九亭)'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 또 '세심대'가 있고 '옥류동'의 사이이니 그런고로 혹 '세옥정(洗玉亭)'을 그 이름으로 삼을까도 하는데, 그대가 연구해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 "사십의 잘못을 아는 것이 비록 군자가 덕을 닦아 나아가야 할 바 이기는 하나 이 정자에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적절치 않고, 또 옥류동과 세심대는 돌아보면 곧 족한데 그것을 이름으로 중복하는 것은 정자의 격을 떨어뜨립니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정자에 올라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시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을 좌우로 불러 맞아들여 주인이 되었다." 하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릇 이태백·두보의 시와 고개지·육탐미의 그림은 천하에 이름이 났으나 그 출생한 것이 각각 떨어져서 앞뒤로 달리 하여 동시에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였기에, 비록 향로봉의 폭포, 동정호의 누각에 시는 있되 그림은 없었으니 이는 천고승지의 한이었습니다. 지금 이병연과 정선씨의 시와 그림은 다 같이 가히 일세에 가장 뛰어나다 할 수 있고 그 사는 곳이 모두 그대의 정자에서 멀지 않습니다. 무릇 이 정자의 빼어남으로 또 다행히 두 분께서 인접하여 매일 지팡이를 들고 짚신을 신고 서로 한 자리에 오갈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이태백과 두보를 왼편에 두고 고개지와 육탐미를 우측에 둔 것과 같으니 그 얼마나 존엄 합니까.
계산에 끼는 안개구름이 아침과 저녁으로 변하는 모습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으로부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에 이르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가 시와 그림 속에 들어오지 않음이 없는데, 시가 형용할 수 없는 바는 혹 그림이 형용하는 것에 있고 그림이 발현하지 못하는 바의 것은 혹 시가 그것을 발현하는 것이 있기에 대게 서로 더불어 꼭 필요하여 없을 수 없습니다. 이에 정자의 빼어난 것이 사천과 겸재를 만나 삼승(三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고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승정(三勝亭)'이라 하고 마침내 이를 위하여 기를 짓는다.
1740년(영조 16) 여름에 귀록산인(歸鹿山人) 조현명(趙顯命)이 적는다.
 |
▶'겸재 정선의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