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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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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성호 이익선생은 조선의 이름난 경승지를 논할 때면 금강산을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들 사모하고, 화려한 재능을 갖춘 이를 논할 때면 중국 우왕 때 전국의 9주에서 바친 금으로 만든 솥과 주나라 종묘에 있는 큰 종을 보물로 만 여기었다고 말하고, 조선에서 지위와 명성이 대단한 최립의 문장과 한호의 글씨를 말하니, 여기에 그들의 일을 기록한 것은 대단함을 표현하고, 최립과 한호 두 사람이 모두 강원도 지방의 고을에 나가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고을에서 금강산과의 거리는 가까웠다. 이에 모두 강원도관찰사 이광준공과 만날 약속을 맺고 달려갔다. 당시에 이광준공의 둘째아들인 이민성은 사서벼슬로 막내아들 이민환은 내한벼슬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서 함께 말을 타고 와서 아침저녁으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산 입구에다 그를 위해 영화로운 자리를 마련하고서 이에 최립으로 하여금 행적을 기록하게 하고, 한호로 하여금 붓을 잡고 쓰게 하였으니, 아마도 예원에서도 이 이상의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정이 금제와 금담사이에 대나무를 그린 것처럼 그린 그림이 있어 지금에 이르도록 첩을 만들어 갈무리하여 의성고을 영천이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소중한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중국 왕발이 조정에서 쫓겨나서 등왕각에 노닐고서 지은 서문에 ‘아버님이 고을수령으로 계셔서 이 명승지를 지난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이광준공은 바야흐로 한 지방의 관찰사의 임무를 지키고 있고, 이민성과 이민환이 연이어 급제하여 광채를 빛내어 신선 고을에서 모시며 노니니, 즐거움이 어찌 그리 많은가? 돌아보건대 이광준공은 향년이 이미 73세이니 한 가문 안에 온갖 복이 모였도다. 이첩은 천고에 더불어 짝할 만한 상대가 없음을 내 알겠거니와 변변찮은 내가 그 아래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또한 3묵의 다음에 있어도 사양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광준의 집에 보관한 해동삼절첩의 발문(鶴洞李公光俊家藏海東三絶跋)-
우리나라의 이름난 경승지를 논할 때면 금강산(金剛山)만을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들 사모하고, 우리나라의 화려한 재능을 갖춘 이를 논할 때면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 때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바친 금으로 만든 솥과 주(周)나라 종묘에 있는 큰 종을 보물로 여기듯 지위와 명성이 대단한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문장과 팔진(八陣)ㆍ육화(六花)와 같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를 말하니, 여기에 그들의 일을 기록한 것이 성대하다고 하겠다.
1603년(선조 36) 연간에 최립과 한호 두 공(公)이 모두 강원도 지방의 고을에 나가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고을에서 금강산과의 거리는 가까웠다. 이에 모두 강원도 관찰사이던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공과 만날 약속을 맺고 달려갔다.
당시에 이광준공의 둘째아들인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은 사서(司書) 벼슬로 막내아들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은 내한(內翰) 벼슬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서 함께 말을 타고 와서 아침저녁으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리고 산 입구에다 그를 위해 영화로운 자리를 마련하고서 이에 최립으로 하여금 행적을 기록하게 하고, 한호로 하여금 붓을 잡고 쓰게 하였으니, 아마도 예원(藝苑)에서도 이 이상의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석양군(石陽君) 이정(李霆)이 금제(金題)와 금담(錦贉) 사이에 대나무를 그린 것처럼 그린 그림이 있어 지금에 이르도록 첩(帖)을 만들어 갈무리하여 의성고을 산운(山雲)에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안에서 전해오는 소중한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옛날에 중국 당(唐)나라의 문장가인 왕발(王勃)이 조정에서 쫓겨나서 등왕각(滕王閣)에 노닐고서 지은 서문(序文)에 ‘아버님이 고을 수령으로 계셔서 이 명승지를 지난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이광준공은 바야흐로 한 지방의 관찰사의 임무를 지키고 있고, 이민성과 이민환이 연이어 급제하여 광채를 빛내어 신선 고을에서 모시며 노니니, 즐거움이 어찌 그리 많은가? 돌아보건대 이광준공은 향년이 이미 73세이니 한 가문 안에 온갖 복이 모였도다. 이 첩(帖)은 천고에 더불어 짝할 만한 상대가 없음을 내 알겠거니와 변변찮은 내가 그 아래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또한 삼묵(三墨)의 다음에 있어도 사양할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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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삼절첩(海東三絶帖)을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이라 칭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