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르그랑 학교”를 방문할 당시, 학생 대표로 뽑힌 한 소년이 환영사를 낭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잘못 알고 온 소년은 비를 맞으며 2시간이나 왕과 왕비를 기다려야 했다.
소년은 비바람에 젖어가며 기다렸다. 마침내 왕의 마차가 도착해서 떨고 있는 소년 곁에 멈춰 섰다. 소년은 빗속에 무릎을 꿇고 환영 연설문을 읽었다. 루이 16세 왕은 커튼이 쳐진 문만 열고는 환영사를 들은 뒤 아무 말 없이 무심히 떠나갔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793년,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r그리고 가족들을 단두대에 올려 처형한 장본인은 바로 “로베스피에르” 바로 그 소년이었다. 실로 우연한 만남이 비극적으로 이어진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의 춘추시대 말에는 양자강 부근에 풍부한 물산과 제철업을 일으켜 강대국으로 성장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등장했다. 역사적으로 가까이 인접해 있는 나라들끼리는 늘 앙숙이었다. 월나라 왕이 죽자 오나라는 그 틈새를 노리고 월나라로 공격해 갔고, 오나라의 젊은 왕 구천은 결사대를 조직해 오나라 공격을 막아냈다. 이 때 오나라 왕 합려는 적이 쏜 화살이 발가락에 맞자 후퇴를 했다. 합려는 이 상처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자 태자인 부차를 불러 유언을 남겼다.
“너는 구천이 네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꼭 원수를 갚아다오!” 유언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 부차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초 소생,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3년 안에 반드시 복수 해드리겠습니다.”
이후부터 부차는 병사를 조련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잠을 잘 때는 장작개비 위에서 자는 등 (와신: 臥薪) 복수의 칼을 갈았다. 왕위에 오른 부차가 2년이 되는 해, 선왕의 복수를 위해 힘을 키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월나라 구천은,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부차는 월나라 구천의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정예군대를 요소에 배치시키고 급습 전략으로 허를 찔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패한 구천은 남은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도망쳤으나 부차는 군대를 풀어 회계산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 때 구천은 사자를 보내 항복의사를 전하면서 부차에게 목숨을 구걸 하였다. 그러자 승리에 도취한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오나라 명장 오자서가 나서서 반대를 했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오나라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구천을 죽여 없애고 완전히 멸망시켜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의견을 묵살한 체 구천을 풀어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한 구천은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곁에 쓸개를 걸어두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쓸개의 쓴맛을 맛보면서(상담:嘗膽),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았지?”라고 스스로 물으며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이처럼 구천이 복수의 칼날을 가는 동안 오나라 부차는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이웃 초나라와 제나라 등과 전쟁을 치루면서 국력을 너무나도 많이 쇄진했다. 결국 이 틈을 노린 월나라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해 부차를 사로잡았지만 구천은 과거 일을 떠올리곤 부차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다. 그 때 신하인 범려가 나서서 이를 만류하고 들었다.
“대왕께서 22년간의 쓰라림을 맛보며 이룬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되며, 하늘이 주는 기회를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지켜본 부차의 선택은 자결이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면서 몸을 낮출 때를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했고, 복수를 다짐하며 스스로를 자책할 때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한다. 유명한 고사들은 바로 이 두 나라 역사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결국 오월동주, 와신상담의 역사를 걸어온 오나라와 월나라는 앙숙이 돼 대결해 오다가 오나라가 먼저 멸망하자, 얼마 후 월나라도 멸망의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운명적인 만남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석패해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 후보는 반유신과 민주화 투쟁을 하던 중 중앙정보부 직원에 의해 일본 도쿄 한복판에 있는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됐다. 소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후 그는 바다에 수장될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서울로 강제압송 됐다.
1980년에는 결국 민주화의 봄이 왔다.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광주항쟁 하루 전 80.5.17 전국에 계엄령을 발령하면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던 김대중 의장과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을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그리고 계업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대중을 선동해 민중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결국 이 사건은 5.18광주민주화 항쟁을 유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후 역사는 무죄를 선언 했다.
정적으로부터 수없이 목숨을 위협받던 그는 1998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 취임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를 용서했다. 그러한 화해 정신과 민주화에 대한 열정 그리고 햇빛정책은 그에게 노벨 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과 박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또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