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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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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계곡 장유선생은 우의정 김상용의 지시에 의하여, 1643년(인조 12) 겨울 어느 날에 53년 전인, 임오년(1582년)에 사마시에 입격한 사람들의 모임에 모인 사람 8명중에 3명의 정승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 특이한 사실을 도첩 뒤에 기록하라고 하여, 특징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첩 뒤에 기록한 글이다.
-임오년에 과거시험 합격자 모임의 도첩(圖帖) 뒤에 씀-
1634년(인조 12)의 겨울 모월(某月)에 1582년(임오년)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모임이 병조의 옛 청사에서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8인이었는데, 그중에는 3사람의 정승도 끼여 있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글을 보내 나에게 명하기를, “사마시(司馬試)가 비록 대과(大科)는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합격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로 말하면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무리와는 유가 다르다고 할 것이다. 지난 1582년으로 부터 지금 1634년에 이르기까지 벌써 5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때의 사람들 모두가 호호백발(皜皜白髮)이 되고 세상에 얼마 남아 있지 않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200명의 합격자 가운데 생존해 있는 이가 10분의 1도 채 못 되는데 그중에서 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이는 고작 8인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8명이 같은 방에 합석(合席)하여 술잔을 들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창안백발(蒼顔白髮)의 모습으로 하룻밤의 환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노경(老境)에 보기 드문 흐뭇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임으로 말하면 또 특이하게 기록될 만한 점이 있다. 대저 사마시는 예로부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생원과 진사가 되고 나서도 과제(科第)에 오르는 경우는 드물고, 과제에 오르고 나서도 중록(重祿)을 받는 관직을 얻기는 더 어렵고, 그 관직을 얻고 나서도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고위 관원이 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기만 하다. 그러니 고위 관원의 반열을 뛰어넘어서 정승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된다고 하겠는가. 같이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의 정승이 나오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할 것인데, 우리들의 경우는 3사람이나 동시에 정승이 되어 한 모임에서 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런 일은 아마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희한한 사건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뭔가 기념으로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기에 소첩(小帖)을 만든 뒤에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명씨(名氏)를 기록하였다. 그러니 그대가 우리들을 위해 글을 하나 지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합격자들이 모이는 것은 보통으로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근래에 합격한 사람들일수록 그 회합이 더욱 빈번하다. 보통으로 있는 일은 기록할 가치가 없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자면 끝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임이야말로 정말 세상에 보기 드문 희귀한 경우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모임에 속한 제공(諸公)을 보건대, 연치(年齒)가 높은 이는 이미 팔순을 넘어 그 이상 되고 가장 나이가 아래인 사람도 칠순을 넘어섰다. 저 기영회(耆英會)나 구로회(九老會) 등은 원래부터 연치를 기준으로 결성된 모임이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꼭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도 연치가 모두들 높기만 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기이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나라의 삼정승이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 중에서 똑같이 나와 한 방에 회동하였고 또 모두들 높은 수명을 누리고들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겠는가. 선조(先朝)때 얼마나 인재가 융성하게 나왔고 빛나는 시대에 얼마나 후하게 복록(福祿)을 내려 주었는지 그 일단(一端)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도첩 뒤에 기록하면 어떨까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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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사마방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