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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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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수당 이남규선생은 말하기를 선조 이산해 공의 화상이 둘이 있는데, 모두 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하고 치관과 서대에 초록 도포와 검정 신발 차림이니, 같은 시기에 전사한 것이라 하고, 그 중 하나는 보령시 관촌의 사당에 모셔져 있고, 다른 하나는 예산군의 한곡에 모셔져 있는데 바로 우리 집이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되어 바탕의 천이 낡아서 떨어졌으며, 관촌에 모신 것은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래서 자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낡아서 떨어질 것이 크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그리자고 논의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으나, 힘이 모자라서 착수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봄에 비로소 협의가 이루어져서, 이 해 2월에 한곡에 모신 것을 서울로 모셔 와서 조중묵에게 부탁하여 다시 두 벌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4월에 끝이 났으므로 5월에 다시 한곡으로 모셔 오기로 했었는데, 이 때 나라에 난리가 나서 길이 막혀 다닐 수가 없었기에 2년이 지난 1896년 10월에 비로소 모셔 왔으며, 그 중 하나는 관촌에다 모셨다. 그런데 구본은 원래 연월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 초전의 그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초전인지 중간에 다시 새로 그린 것인지도 역시 알 수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선조 이산해(李山海)공의 화상(畫像)을 중모(重摹)한 기문-
선조 아계공의 화상이 둘이 있는데, 모두 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하고 치관(豸冠)과 서대(犀帶)에 초록 도포와 검정 신발 차림이니, 같은 시기에 전사(傳寫)한 것이겠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보령현(保寧縣) 관촌(冠村)의 사당에 모셔져 있고, 다른 하나는 예산(禮山)의 한곡(閒谷)에 모셔져 있는데 바로 우리 집이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되어 바탕의 천이 낡아서 떨어졌으며, 관촌에 모신 것은 정도가 더욱 심하다. 그래서 자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낡아서 떨어질 것이 크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그리자고 논의하기 시작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으나, 힘이 모자라서 착수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봄에 비로소 협의가 이루어져서, 이 해 2월에 한곡에 모신 것을 서울로 모셔 와서 조중묵(趙重默)에게 부탁하여 다시 두 벌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4월에 끝이 났으므로 5월에 다시 한곡으로 모셔 오기로 했었는데, 이 때 나라에 난리가 나서 길이 막혀 다닐 수가 없었기에 2년이 지난 1896년 10월에 비로소 모셔 왔으며, 그 중 하나는 관촌에다 모셨다. 그런데 구본(舊本)은 원래 연월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 초전(初傳)의 그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초전인지 중간에 다시 새로 그린 것인지도 역시 알 수가 없다.
1896년 10월 26일에 후손 이남규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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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이산해선생의 화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