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해설 : 유회당 권이진선생이 말하기를 1621∼1644년 사이에, 우리조선에는 시 짓는 법도가 점점 쇠퇴해졌는데, 근래 홍수주 공의 근체시는 청신하고, 착상이 기발해서 시단에서 단연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공이 시를 짓는 여가에 여기로 붓을 들어 수묵화를 쳤는데, 포도그림은 더욱 일품이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직하고서, 즐기어 진귀한 보물로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대게 시는 전사할 수 있지만 그림은 귀한 진적이기 때문이다. 만년에 그린 2폭의 포도그림은 푸른 잎과 초록색 열매가 완연히 비와 이슬을 맞고 자라난 것 같아서, 기이한 보배가 되었으니 더욱 어떻다 하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그림의 1폭은 잎만 그리고, 열매를 그리기 전에 공이세상을 떠났다. 공의 둘째 아들 홍우열은 공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아직 어려서 일찍이 한 번도 공을 모시고,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일이 없었는데, 자라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그림을 보완하여 잎사귀와 열매가 서로 어울리게 되었으니, 그 사실이 더욱 기이하다고 하겠다. 내가 평소 한가할 때 공을 모신 것이 대략 수십 년이라 공의 평소 말씀이나, 시문을 생각할 때면 매양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이제 공의 장남 홍우철이 나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한마디 제사를 기록해달라고 하므로, 다시 한 번 감상하면서 이렇게 공경히 쓴다고 기록하였다.
-홍수주(洪受疇)의 그림 족자(簇子)에 대한 발문-
1621∼1644년 사이에, 우리조선에는 시(詩) 짓는 법도가 점점 쇠퇴해졌는데, 근래 호은(壺隱) 홍수주(洪受疇) 공의 근체시는 청신하고, 착상이 기발해서 시단에서 단연 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공이 시를 짓는 여가에 여기(餘技)로 붓을 들어 수묵화를 쳤는데, 포도그림은 더욱 일품이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직하고서, 즐기어 진귀한 보물로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대게 시는 전사(傳寫)할 수 있지만 그림은 귀한 진적(眞蹟)이기 때문이다.
만년에 그린 2폭의 포도(葡萄)그림은 푸른 잎과 초록색 열매가 완연히 비와 이슬을 맞고 자라난 것 같아서, 기이한 보배가 되었으니 더욱 어떻다 하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그림의 1폭은 잎만 그리고, 열매를 그리기 전에 공이세상을 떠났다.
공의 둘째 아들 홍우열(洪禹烈)은 공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아직 어려서 일찍이 한 번도 공을 모시고,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일이 없었는데, 자라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그림을 보완하여 잎사귀와 열매가 서로 어울리게 되었으니, 그 사실이 더욱 기이하다고 하겠다.
내가 평소 한가할 때 공을 모신 것이 대략 수십 년이라 공의 평소 말씀이나, 시문을 생각할 때면 매양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이제 공의 장남 홍우철(洪禹哲)이 나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한마디 제사(題辭)를 기록해달라고 하므로, 다시 한 번 감상하면서 이렇게 공경히 쓴다.
 |
‘홍수주(洪受疇)의 묵포도도(墨葡萄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