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해설 :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가 오헌(吾軒)이란 당호편액을 쓴 글씨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법(西法)에 대한 동교(東敎)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실학사상의 연장선상에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교량적 역할을 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瓛齋)이다. 할아버지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고, 아버지는 현령 박종채(朴宗采)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 그는 15세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하면서〈주역(周易)〉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1830년 세자의 급서(急逝)와 연이은 부모와의 사별로 칩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조부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윤종의(尹宗儀) · 남병철(南秉哲) · 김영작(金永爵) · 신석우(申錫愚) · 신석희(申錫禧) · 김상현(金尙鉉) 등 당대 학자들과 교유했다. 1848년 중광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을 거쳐 병조정랑, 용강현령, 부안현감, 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시찰했다. 1861년 제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중국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목격했고, 심병성(沈秉成) · 왕증(王拯) · 풍지기(馮志沂) 등 중국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목격하여 처리했다. 1864년 고종 즉위 후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1872년 강문형(姜文馨) · 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면서 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이 글씨는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 전통마을 출신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의 당호편액이다. 그는 박규수와 같은 반남박씨로 10살에 사서(四書)에 통했으며 문장이 맑아 속된 기운이 없었다. 184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는데, 1868년에 신정황후(神貞皇后)의 중갑축하연(重甲祝賀宴)에 참석하여 통례로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고, 이후 동지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했다.
-박규수(朴珪壽)가 오헌(吾軒)이란 당호편액을 씀-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此爲陶令襟期, 物吾同樂, 渾然天眞語也. 夫知吾者鮮矣, 而全吾者爲尤鮮. 吾有所愛然後, 乃能從吾所好. 可語此者, 吾宗有其人也. 瓛卿書于白松堂乙亥仲秋.
뭇 새들도 깃들 곳 있어 즐거운 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고 했는데, 이는 도연명(陶淵明)의 흉금이 사물과 내가 즐거움을 함께하는 혼연히 천진스러운 말이다. 무릇 나를 아는 자가 드물지만 나를 온전히 하는 자는 더욱 드물다. 내가 사랑하는 바가 있은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우리 반남박씨 종친 중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다.
1875년(고종 12) 8월 백송당(白松堂)에서 박규수(朴珪壽)가 쓰다.
 |
'박규수의 오헌(吾軒) 당호편액 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