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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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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봉화군 청암정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란 편액을 쓴 글씨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이며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의 강화를 통한 정치 ·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1617년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624년 경기도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하여,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1646년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50년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0년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朞年服)에 반대하고 제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했다.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그도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에 있는 동안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서인의 주장에 따라 정해진 대공복(大功服)의 모순이 지적되어 앞서 그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대공복은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 현판글씨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靑巖亭)에 쓴 현판으로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다가, 1682년(숙종 8) 88세 되는 해 4월에 청암수석 이란 4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그의 절필로 알려진 것이다.
-허목(許穆)이 청암정에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을 씀-
靑巖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巖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청암정(靑巖亭)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 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네.
특별히 청암수석(靑巖水石) 4글자를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1682년(숙종 8) 초여름 상순에 태령노인(台嶺老人) 허목(許穆)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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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의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