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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선생의 영정에 찬문을 쓴 글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1368년 성균시에 입격하고, 이듬해 문과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와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다. 1389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본 죄로 황해도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경상도 영해(寧海)와 흥해(興海), 경기도 익주(益州)등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청도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 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 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선생의 진찬을 씀-
온후한 빛 엄중한 얼굴, 그를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며, 그를 대하면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듯 하도다. 그의 얼굴이 윤택하며 등이 퍼진 것을 보는 사람이면 화하며, 순한 덕이 마음속에 쌓였음을 알 수 있으리라. 이것은 그의 용모를 말한 것이다. 광채는 만 길이나 솟아오르며, 기염은 기다란 무지개를 뱉어 놓은 듯 그가 궁한 때에 있어도 뜻을 꺾이지 아니하였고, 그가 출세함에 이르러서는 그의 인격이 더욱 높았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넓고 스스로 만족한 때문이니, 반드시 정의가 집적되어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기상을 말한 것이다.
선(善)을 좋아함이 이렇게 철저하였고, 일을 처리함이 이렇게도 밝았다. 관대함은 바다의 넓음과 같았고, 믿음성과 결단성은 시귀(蓍龜)의 공정함과 같았다. 곧 그의 국량(局量)과 규모(規模)의 크기는 또한 오활하고 괴벽하고, 고루한 자가 따르지 못할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재능을 말한 것이다. 만일 그 성리(性理)에 대한 학문, 정치에 대한 공부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우리 도의 정대함을 밝혔고, 정의에 입각하여 일어서는 나라의 운명을 도왔다. 문장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요. 감화는 한없는 지역에 흡족하였으니, 정말 국가의 중신(重臣)이며 후학의 스승이로다. 이것은 그의 학문, 사업, 문장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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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鄭道傳)선생의 영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