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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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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선생이 진상(眞像)에 자신이 쓴 글이다. 그는 고려 후기의 문신 · 시인이다.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에 장원, 이어 대과에 합격했다. 그해 대학자인 권보(權溥)의 딸과 혼인했다. 1303년(충렬왕 29) 권무봉선고판관과 연경궁녹사를 거쳐 1308년(충렬왕 34) 예문춘추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고, 같은 해 중국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 · 조맹부 · 원명선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충숙왕 6)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충숙왕 10) 풀려나오게 했다. 1357년(공민왕 6)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목왕 때는 개혁안을 제시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도와 문을 본말(本末)의 관계로 파악하여 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도 도의 전달에 상대적인 비중을 두는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 · 관풍기속(觀風記俗) · 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산문은 앞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 익재난고의 소악부(小樂府)에 고려의 민간가요를 7언절구로 번역한 1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의 저술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 전한다. 경주의 구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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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재 이제현선생의 초상화' |
-나의 초상화를 그려두는 이유의 글(益齋眞自讚)-
獨學而陋。聞道宜晚。不幸由己。何不自反。何德于民。四爲國相。幸而致之。祗速衆謗。不揚之貌。又何寫爲。告爾後嗣。一覩三思。誡其不幸。早夜以勉。毋苟其幸。庶幾知免。
독학(獨學)을 하여 견문(見聞)이 적고 좁으니, 도를 들은 것도 당연히 늦었단다. 나의 불행이 자기로부터 말미암으니, 어찌 스스로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백성에까지 미치어서 4번이나 국상이 되어 다행히 그 임무를 다 하였으나, 다만 사람들의 비방만 받았구나.
잘 생기지 못한 외모(外貌)는 또, 그려서 무엇 하겠느냐 만 너희 후손들에게 알리노니, 한 번 보고 3번 생각하여야한다. 나의 불행을 경계하여 아침저녁으로 힘써야 된다. 요행만을 구차히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不幸)했던 나의 신세를 거의 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