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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발문을 쓴 글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1633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사헌부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다시 물러났다. 1658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하여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1680년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퇴계선생의 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 진적을 보고 쓴 송시열의 발문-
이 회암서절요의 서(序)와 목록을 영인본으로만 보아오다 정선(鄭敾)의 외할아버지며 지금은 진사(進士)인 박자진(朴自振)씨가 이황(李滉)선생의 회암서절요의 서문 초본 진적(眞蹟)을 내가 머물고 있는 경기도 화성의 별서가 있는 무봉산중(舞鳳山中)으로 가지고와 보이니, 내가 2차 예송논쟁으로 흰 버선을 신고,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에 뜻밖에 퇴계선생의 초본을 보게 되니 만져보고 또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보고 또 보고 하루해가 다 기울었는데도 만지고, 또 만져 종이가 부풀어 종이 털이 일어나도록 보아도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참 좋다. 내 무봉산중에 오기를 잘했네. 박진사(朴進士)의 말을 들어보니 박진사의 장인(丈人) 공조정랑 벼슬을 한 홍유형(洪有炯)씨로부터 이 진적을 얻었으니 홍유형씨는 퇴계선생의 외현손이다. 1674년(현종 15) 중추일 후학 송시열(宋時烈)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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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의 송시열 발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