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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경상도지도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고 내용을 기록한글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 · 학자이다. 가문은 고려 말 선산(善山)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때에 이르러 박홍신(朴弘信)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진사시에 입격하고,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로 벼슬길에 올랐다. 세조가 천문 · 지리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으로서 본격적인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1470년 수찬지제교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咸陽)군수가 되었다. 1475년에는 중직대부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로 승진했다. 다시 선산(善山)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응교지제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경기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김종직선생의 경상도지도지(慶尙道地圖誌)-
한 도(道)의 장수가 된 사람은 지도를 몰라서는 안 된다. 평상시의 경우는 그만이 거니와, 급한 때에 이르러서는 그 산천의 험난하고 평탄함과 도리의 멀고 가까움에 대하여, 진실로 눈과 마음으로 익혀두지 않았을 경우에는 아무리 방략(方略)이 있다 할지라도 베풀 데가 없는 것이다. 우리 경상도는 이면(二面)이 바닷가에 연접해 있고, 본상(本廂)이 최남단에 위치해 있어 실로 도이(島夷)들과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갑자기 저 악독한 섬 오랑캐들이 출몰하며 우리의 진영을 엿볼 적에, 혹은 그들을 쫓아 잡거나, 혹은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격서(檄書)를 달려 보내어 군대를 징발하는 데 있어 그 먼 곳을 건너가 사의(事宜)를 맞출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이것을 두렵게 여기어 성부(盛府)에 계책을 말하여 화사(畫師)를 시켜 경상일도의 동서남북의 길이를 자세하게 그려서 청사에 펼쳐 놓았다. 그렇게 해 놓은 다음에는 명산, 대천과 읍락(邑落), 우전(郵傳)과 연대(煙臺)의 척후(斥堠)와 금대(襟帶)의 요충지가 일목요연하게 되었다. 지금은 성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어 바다에는 파도가 일지 않으나, 환난을 미연에 대비하는 계책을 미리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만일의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 이 그림을 상고하여 책응(策應)의 방도로 삼는다면 어찌 작은 도움이야 없겠는가. 산과 계곡의 굽어든 곳과, 해안의 후미진 곳과 호구의 많고 적은 것까지는 비록 상세하게 분석해 놓지 못하였지만, 그 쌀을 모아서 산천에 비유한 것과 땅을 그어서 형세의 대략을 설명한 것에 비유한다면, 같은 등급으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 김종직(金宗直)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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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慶尙道)의 고지도(古地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