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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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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본인의 화상(畵像)에 대하여 자기가 글을 쓴 내용이다. 그는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지평, 정언,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대원군세력과 제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 되었으며, 1898년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거부, 철도이용 안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전라도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
▶나의 화상(畵像)에 대한 자찬(自贊)
古我今我, 壯衰之形容逈別, 語爾默爾, 好惡之物情不同, 知時識勢, 雖未有民國長筭, 引義當道, 誓不負芹曝彛衷.
옛날에도 나였고 지금에도 나인데. 젊고 쇠한 형용이 아주 다르고. 말하여도 너 묵묵하여도 너인데, 호오의 감정이 같지 않구나.
때를 알고 형편을 알아, 민생과 국가 위해 좋은 방책 못 내지마는. 의를 끌어 도에 맞게 하여, 맹세코 근폭의 충정 저버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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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의 초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