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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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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선생은 사임당신씨의 산수도를 보고 찬문을 남겼다. 사임당신씨가 남긴 여러 작품 중에서 안견의 그림을 교과서로 삼아 한국적 특색을 가미시킨 산수도이기에 화면 무게를 좌우 상단에 배치하여 사임당신씨 만의 특유한 미술세계를 개척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수묵 위주로 처리하였으나 나무 주변에 약간의 담황채색을 가미한 것이 보인다. 산수의 본질만을 취하는 간결한 구도와 일체의 장식성을 배제한 묵법으로 중천에 뜬 둥근 달이나 서산으로 지려는 해를 배치해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했다. 그는 1509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정자·주서·정언 등의 벼슬을 거쳐 수찬으로 있으면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하고, 대묘(大廟)에 위패를 두도록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이조정랑·교리·직제학 등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그 뒤 왕자의 사부(師傅)와 승지 등을 지내고,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1533년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5년 형조판서·호조판서, 1537년 병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에 타자 중종의 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베껴 다시 봉안했다. 1545년 대윤(大尹) 일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尹任) 등이 몰락하자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냈다. 사직한 뒤에는 고향인 전라도 익산에 머물면서 여생을 마쳤다.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의 글씨를 잘 써서 필명이 높았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동양신씨화족(東陽申氏山水畵簇)의 화찬
百折溪流千疊山。巖廻木老路紆盤。樹林霧靄空濛裏。帆影煙雲滅沒間。落日板橋仙子過。圍棋松屋野僧閑。芳心自與神爲契。妙思奇蹤未易攀。
시냇물 굽이굽이 산은 첩첩 둘러 있고, 숲에는 아지랑이 자욱이 끼었는데 돛대는 구름 밖에 뵐락 말락 하는구나. 해질 녘에 도인 하나가 나무다리 지나가고, 소나무 정자에는 야승들이 한가로이 바둑 두네. 꽃다운 그 마음은 신과 함께 열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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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신씨의 산수도(山水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