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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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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행사장에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대부분 구미에서 힘(?) 있는)에게 고급 우산을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이 우산을 받지 못하였다고 투덜거리면서 육두문자를 써가며 온갖 욕을 다하는 사람이 있었다. 욕을 하도하기에 필자가 선물로 받은 그 우산을 주었더니 못 이기는 척 받는다. 그 흔해 빠진 우산 하나가지고. 70년대처럼 우산이 귀한 시대도 아닌데.
우산은 한자어로 “雨(비우)와 傘(덮개 산)” 합성 명사이다. 비를 막기 위해 덮개처럼 가리는 우비의 하나인, 우산의 뜻이다. 요즘 날씨는 비가 자주 내리다 보니 아침 출근 시 우산을 가지고 가야할지 망설이게 한다.
개화기 때만 하더라도 남녀가 내외하기 위해 쓰개치마가 사라지던 과도기로, 젊은 여성들은 양산을 대신 사용해 내외하였다. 이 때 장가갈 때 우산 하나 못살 만큼 무능한 남자를 가리켜 “새 각시 우산 하나도 못 사갈 놈”이라는 말도 생겼다. 요즘이야 우산을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아서인지 식당이나 기타 영업집에 가면 깜박하고 우산을 두고 간 곳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우산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인지 잃어버려도 굳이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중국 황제는 화개(華蓋)를 썼다. 주로 일산(日傘)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권력자의 의장(儀仗)이다. 왕실에서는 자루가 긴 큰 일산을 썼는데, 황제는 노랑, 왕과 황태자는 빨강, 왕세자는 검정 일산을 사용했다.
그리고 일반 관리는 흰 바탕에 푸른 선을 두른 일산을 썼다. 이는 모두 권력과 위엄을 상징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일산은 대가 매우 길다 그리고 시녀가 뒤에서 앞서 가는 상전을 씌어 주는 형태이다. 고려 때의 장량향우산(張良項雨傘)은 우산과 양산을 겸한 것으로 벼슬아치가 외출 시에만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민화 호렵도에도 사냥 나온 왕족이 우산을 받친 모습이 보인다. 우산은 왕족과 귀족에 있어서 신분과 권력의 상징으로 쓰였다.
우리민속은 예부터 가계나 실내에서는 우산을 펴지 못하게 하였다. 복(福)은 위 -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우산을 폄으로써 복을 차단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마루나 대들보에 좌정한 성주신이 내리는 복을 거부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매우 금기시하였다. 또 우산을 방안에서 펴면 죄를 짓게 된다고 하였다. 마치 감옥에서 죄인이 햇볕을 보지 못하는 경우를 유추한 것으로 보인다.
우산을 거꾸로 들면 벼락을 맞는다는 속신도 있다. 거꾸로 든 우산은 비를 막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며, 이렇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벼락을 맞아도 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의식의 표현이다. 또 맑은 날 우산을 가지고 나가면 필요 없이 비를 부르는 날궂이 한다고 하여 비난했다.
또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고 왕도 절식을 하며 거친 옷을 입는 등 근신을 했다. 이 때, 비가 오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우산 쓰는 것이 금기 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을 거역함은 부도덕하다고 여긴 때문이다.
유관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56년간 우의정 등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집은 너무 낡아 장마 때만 되면 부인과 함께 우산을 펴고 방 안에 떨어지는 비를 그어야 했다. 그러면서 “우산조차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장마철을 견디어 낼까?“ 하고 걱정했다. 이후로 방안에서 우산을 펴고 비를 긋는 것을 청백리의 표상으로 삼았고, 이 길은 청빈 사상을, 비우사상(庇雨思想)이라고 했다.
화류에도 등급이 있었다. 침구 의술과 가무, 예절에 능하고 사서에도 달통한 기생은 1패(牌)였다.
2패는 기생이 아닌 은근짜로 몰락한 사족의 부녀나 과부가 섞여 있어 주택가에 끼여 살며 매춘하였다. 3패는 창녀로서 “다방머리”이다. 이들은 잡가로 유혹하여 매음하였다. 이들도 우산으로 그 신분을 나타냈는데, 1패인 기생은 홍산(紅傘)을 3패는 청산(靑傘)을 썼다.
강대국의 핵무기 덕분에 누리는 평화를, “핵우산 아래에서의 평화” 라 한다. 그러나 보호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핵우산이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