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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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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내 꿈은 죽을 때까지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어떤 뮤지션은 ‘대표작이 뭐냐고 하면 다음 곡’이라고 한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꿈과 희망을 찾는 것, 계속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며칠 전 모 언론의 ‘제6회 서울 청소년 창의 서밋’에 참가한 일본 동경대 겐다 유지교수와 조한혜정 교수가 꿈을 잃어가는, 절망의 청소년 문제에 대한 대담에서 나온 말입니다.(경향신문 2014.9.29)
좀 더 풀어보면 근간에 벌어지는 절망적인 일련의 사태-특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에서 그리 뽐낼 것도 내 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의 대부분은 ‘힘들다’ ‘어렵다’이고, 한일 양국 청년들의 일부라 하더라도 ‘일베’(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니 ‘재특회(在特會·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라는 극단, 극렬, 극악의 모습들은 히끼고모리(운둔형 외톨이), 니트족(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 변화한, 즉 외로움이나 절망에서의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서 독버섯처럼 돌연 변이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현실, 특히 최근의 모습은 암울함 그 자체입니다.
희망이라는 용어가 단순히 책의 제목이거나 덕담의 좋은 방식으로 사용되는 현실, 세월호를 거치면서 무책임, 무대책, 무정견의 대통령을 중심한 정부 대응이나 가면 갈수록 의심만 증폭시키는 여당, 문제를 찾아 밝히며 재발을 막는 것이 정체성인 야당의 지리멸렬…….
그런데도 앞을 다투어 나타나는 쥐어짜듯 악랄한 모습은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요?
국민 건강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고리 걸어놓고 양고기라 외치는 담뱃값 인상안,
지방분권이 완벽한 나라(?)이기에 '지방자치단체의 요청‘이라면 어쩔 수 없다며 눈감고 아웅 하는 주민세 인상안,
제발 유언비어이기를 바랍니다만 교통 범칙금 두 배 인상,
적자투성이 예산으로 내년 국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할 순 적자가 매일 1조원대,
손뼉 치는 강남의 부동산 경기, 분양가 인상 등의 거품 자체인 부동산 대책 .........
어느 하나 희망을 말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지역도 이 이야기에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밀양송전탑이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청도 송전탑과 할머니들의 울부짖음, 울진군 신경기변전소 앞에서 주민들,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씨는 45m 높이 공장 굴뚝 위에 100일을 넘게 외로이 찬바람 앞에 서서 병드신 장모님을 찾아가지 못하는 아픔에 울고 있습니다.
결실과 단풍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계절인데...... ‘목에 가시’처럼 걸립니다. 그들에게 닥친 고립과 절망 그리고 소수자라는 이름의 핍박이 아프고 서럽습니다.
희망버스와 아픔을 겪고 있는 할머니들이 있음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것으로 유일함인 지금의 모습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희망의 말이 그립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절망적인 사람을 돌보라’(우치다 다쓰루, 오카다 도시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입니까?
아니면 이리도 절망하게하는 집권자, 위정자, 기득권자 앞에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도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Memento mori, Hominem te esse memento. 로마 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성대한 개선행진을 할 때 바로 뒤에 노예를 세워놓고 계속 외치게 한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구에서 열리는 희망에 관련한 애니메이션 독립영화제 구경이나 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