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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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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사제첩(麝臍帖)』의 표지에 글을 쓴 것이다. 그는 1735년 세조어진 모사에 불응하여 투옥된 바 있으며, 1748년 숙종어진 모사에도 감동(監董)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했다. 인왕산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서 정선(鄭歚)과 이웃해 살면서 이병연(李秉淵) 등과 어울려 시화(詩畵)를 논하며 각별히 지냈다.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했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사제첩은 생활주변의 일상적 풍경을 직접 사생한 15점을 모은 화첩으로 풍속화(風俗畵) · 영모화(翎毛畵) · 초충도(草蟲圖)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15점의 작품은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초고(草稿), 그리다 만 것, 완성작 등이 뒤섞여 있으며 매우 뛰어난 수작이 있는가하면 다소 떨어지는 것도 보이는 등 작품의 수준도 일정치 않다. 표지는 왼쪽에 조영석이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는 뜻의 '사제(麝臍)'라는 표제를 달고, 오른쪽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경고문을 적어 놓았다.
그러나 화첩 첫 장에 쓰인 이병연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그가 세조어진 중모사(重模事)로 파직된 1735년 50세 이후에 그려서 간직하고 있었던 작품들을 아들이 모아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또다시 1748년 63세 숙종어진 중모사를 거부한 일로 큰 곤욕을 당하였는데 발문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아 편년하한을 63세 이전으로 본다. 그러나 60대의 노필(老筆)이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50대에 제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영석(趙榮祏)이『사제첩』의 표지에 글을 씀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한 영조가 1748년 숙종의 어진(御眞)을 마련하면서,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그는 자신은 선비인데 천한 재주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명을 거부하다 결국 파직을 당했다. 그림 재주로 인해 욕을 당한 후회의 마음을 화첩 제목에 담았다.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麝臍. 勿示人, 犯者非吾子孫. 사제. 남에게 보이지 말라, 어기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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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 조영석의『사제첩(麝臍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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