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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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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정선의『정문입설도』에 화제를 쓴 그림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이며, 특히 남종화풍을 토대로 조선의 산천을 담은 진경산수의 전형을 확립하여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화풍을 따른 일련의 화가들은 정선파(鄭敾派)라 불린다. 금강산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한성부주부,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하양현감을 거쳐 훈련도감낭청, 양천현령을 역임하였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사도시첨정, 첨지중추부사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이 그림은 날이 짓궂다고 배움을 거를 일인가. 눈 오는 날에도 스승을 찾아가 배우기를 마다 않고, 폭설에도 예를 지킨 옛 학자의 이야기이다. 송나라 유조(游酢)와 양시(楊時) 두 학자가 정이(程頤)를 처음 찾아뵙고, 나서는데 정이가 마침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유조와 양시는 차마 물러나노라 인사를 못하고 선 채로 기다렸다. 정이가 눈을 뜨고 말했다. 자네들 아직 거기 있나, 이제 가서 쉬게나. 문 밖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정문입설(程門立雪)의 사자성어로 통한다. 그의 그림 상단 오른편에 이 네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그림 속 대학자 정이의 집은 소박한 초막이고, 인물은 오직 세 사람이니 참으로 간단한 그림이다. 명상에서 깨어난 정이가 물러나라 허락하느라 뜰을 향해 곤두 앉았다. 뜰에 선 두 학자 유조와 양시는 정강이까지 눈 속에 파묻혔는데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할 따름이다. 집도 담도 온전한데 두 학자만 눈 속에 파묻힌 것이 볼수록 우습지만, 입설(立雪)의 주제를 그린 것이라 이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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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謙齋) 정선(鄭敾)의『정문입설도』에 화제를 씀
程門立雪. 중국 송나라 정이(程頤)선생 집의 문(門)에서 눈 속에 서있다.
▶겸재 정선의『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