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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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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란 편액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글씨이다. 그의 할아버지 설봉(雪峰) 강백년(姜栢年)은 1673년에, 아버지 백각(白閣) 강현(姜鋧)은 1719년에 각각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자신도 71살이 되던 1783년에 3대 연이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할아버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아버지 그리고 자신까지 3대 내리 명망 있는 벼슬을 지내고 장수하여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그 기쁨과 영광이 얼마나 컸을까.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세기영(三世耆英)이란 인장을 새겨 여러 작품에 찍었다. 그는 아버지가 64세에 낳은 막내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가난과 건강 때문에 32세부터 6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처남인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 집안이 있는 경기도 안산에서 연객(煙客) 허필(許佖) 등과 교유하며 벼슬 없이 지냈다. 영조가 1773년 영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1776년 64세에 나이 든 유생에게 보이는 기구과(耆耈科)에 수석을 하였다. 다시 1778년 66세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1784년에는 7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건륭황제의 천수연(千壽宴)때에는 부사(副使)로 연경을 다녀왔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그의 집안을 위해 써준 해서횡액으로 여겨진다. 그는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갔기에『삼세기영지가』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기로소 입소자격은 고령의 왕이나 벼슬이 실직(實職)으로 정이품(正二品)인 정경(正卿) 이상이며 나이가 70이 넘은 문신인데 3대가 계속해서 기로소에 들어간 가문은 극히 희귀하며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다섯 가문 정도에 불과하다. 작품의 좌측면에는 김충현(金忠顯)의 배관이 덧붙여져 있고, 우측면에 완당선생 유묵(阮堂先生遺墨)이라고 써져있다. 뒷면에는 내용 중에 약산(若山) 강이오(姜彛五)가 부탁하여 썼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강이오는 정조(正祖) 때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 격으로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데 공헌한 그의 손자이며 문인화가이다.
▶추사 김정희가『삼세기영지가』란 편액을 씀
三世耆英之家.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간 영광스러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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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의『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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