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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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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형곡동 위령탑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손홍섭▪ 박교상 시의원)가 4일, 6.25전쟁 폭격희생자 위령탑(형곡동 산33-5) 현장에서 유족 및 주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 형곡동 폭격희생자 위령탑 추모제 및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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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의 선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한지 24년, 4반세기만의 일이다.
그동안 위원회는 1950년 6.25전쟁 당시인 8월 16일(음력 7월 3일),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형곡동 주민 130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희생자 발굴, 명각대상자 확정, 조형물 공모 등을 거쳤다. 이어 지난 7월 31일에 사업비 1억2천만원을 들여 위령탑 건립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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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희생된 형곡동 주민 130여명의 안타까운 원혼과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건립한 추모비는 향후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기리고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날 참석한 유족들은 “지난 60여년 동안 지울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피 맺힌 한을 위령탑 건립으로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게 돼 감사를 드린다”면서 “ 억울하게 희생된 어른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적극 추진해 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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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북문화신문은 미군 폭격기 형곡동 오폭사건을 단독 보도한 이후 정부차원의 특별법 제정과 추모비를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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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당시의 시무실, 지금의 형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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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문화신문 보도 요약>
▶미군 폭격기 형곡동 오폭 사건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시무실을 맹폭하면서 마을은 삽시간에 비극의 먹구름으로 뒤덮혔고,결국 불바다로 변했다, 설상가상, 폭격이 끝나자마자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 난리통에 1백 3십명을 훨씬 웃도는 주민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참담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당시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된 형곡동(당시 시무실)의 사망 주민은 130여명, 전쟁 중이어서 급박한 정황 때문에 미처 신고하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당시를 목격한 이들은 예상하고 있다.
▶오폭사건, 형곡동 이외에도 선산,구포동서도 발생
지난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구미시 시무실(사창마을), 지금의 형곡동을 맹폭하면서 1백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이외에도 시 관내 타 지역과 이웃해 있는 시군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다 6.25 당시 민간 학살사건의 비극 역시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시에 이들의 영혼을 추모해야 여론이 일고 있다.
1950년 6월 발생한 6.25전쟁을 전후해 미군 폭격기의 오폭사건으로 역사적인 비극을 겪어야 했던 곳은 형곡동, 선산 송림동, 구포동,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등이었다.
경북도의회 특위 보고서(2000년)에 따르면 형곡동(시무실 혹은 사창마을)은 1950년 8월 16일 미국 폭격으로 130여명이 사망했다. 또 전민특위 공동 백서에 따르면 선산읍 송림동 역시 1950년 8월 31일, 미군 폭격으로 38명이 사망했다.
또 1950년 음력 7월 2일에는 미군기가 마을로부터 4키로미터 떨어진 금전동 앞 하천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 50여명을 향해 미군기가 총을 쏘아 18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구미도로변의 피난 행렬도 미군기 폭격을 받아 5-6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오태동 묘곡리에 살고 있는 유족들이 6.25 당시 형곡동에 피난 중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다면서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 1950년 7월 25일에는 전폭기 2대가 피난민 수천명이 생활하는 김천시 남면 연봉천 냇가에 기관총을 발사해 희생자를 발생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함께 미1기갑 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과 일부 장교들이 칠곡군 왜관교 폭파명령으로 다리가 폭파되면서 어린이와 여성등 많은 피난민이 살해되거나 익사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민 학살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60년 6월28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양민 학살자 신고 기간 중 당시 선산에서도 100여명이 신고했다. 이들은 주로 1950년 8월 1차 후퇴 때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거나, 북진 당시 군인에 의해 학살된 양민이었다.
희생된 이들은 농민 69명, 공업4명, 상업 6명, 공무원 3명, 기타 학생과 무직 등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알고 있는 유족들은 수차례 당시의 사찰형사에게 학살날짜라도 알려달라고 하소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보도 내용이다.
이외에도 선산읍 이문리에서도 피난을 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군인이 마을 사람 20-30명을 총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구미시 법성사 인근에서도 억울한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극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
지울 수 없는 형곡동 오폭사건의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 선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조사에 착수한 것은 조사개시 결정 통지문을 받은지 2년 3개월 후인 2009년 4월 7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조사를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안이 발의, 의결되고, 보상에 따른 재조사를 꿈꿔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위령탑 건립 가시화
2012년 5월17일 발족한 구미시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는 2013년 8월 위령탑 건립 및 추모행사를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왔다.
총 12명으로 구성된 추진위는 충북 단양의 6.25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등 2곳을 방문하는 등 밴치마킹에 나섰다.
이어 12월에는 위령탑 건립 향후 추진계획, 희생자 접수 안내 및 기타 토의등 주민설명회를 통해 건립 장소를 구미시립중앙도서관 공원 내로 의결하고 2013년 7월까지 위령탑을 건립하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추진위는 설명회를 시작으로 2013년 2월 명각 대상자를 확정하고 4월까지 조형물 공모, 6월까지 위령탑 건립공사 시행, 7월까지 공사를 마무리 짓고 같은 달 3일,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제를 열기로 했었다.
하지만 조형물 공모, 위치 선정, 일부 인사의 반대등이 겹치면서 당초계획보다 3년이 지난 2016년 8월4일 추모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