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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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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호(韓濩)가 선조임금 앞에서『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쓴 글씨 이다. 그는 1567년(선조 1) 진사시에 입격하고, 1599년(선조 32) 천거로 사어(司御)가 되었으며 가평군수 · 흡곡현령 · 존숭도감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선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왕세정(王世貞) · 주지번(朱之蕃) 등 중국인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의 서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의 안본(贋本)을 임모(臨摹)해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원첩(原帖)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이 결핍되었다. 그는 1575년(선조 7년)에 도산서원의 편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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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봉 한호의『도산서원(陶山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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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산서원의 현판에 관해 전하는 일화가 있다. 선조임금이 당대 최고 명필이자 아끼던 서예가였던 한호를 불렀다.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조는 그에게 자신이 부르는 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호하지 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호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글자씩 부르기 시작했다. '원', '서', '산' 자(字)를 이어서 부르자 그는 마음을 모아 받아썼다. 마지막으로 '도(陶)'라고 부르자 비로소 그는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된다. 그때 자신이 받아쓰는 휘호물이 도산서원의 현판임을 깨달은 것이다. 선조가 이렇게 거꾸로 부른 것은 천하의 명필인 그도 도산서원을 임금 앞에서 휘호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옹졸해지고 붓끝이 떨려 현판글씨가 잘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흔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를 바꾸어서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뜻이 붓 앞에 있어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 는 의재필전(意在筆前)을 선조가 알았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씨를 휘호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현판 글씨의 마지막 글자인 '도' 자(字)를 좀 부자연스럽다. 이 글씨를 쓸 때 그는 33세였고 완전히 성숙한 자신의 글씨를 구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미리 구상하지도 못한 상태로 이 정도의 역작을 즉석에서 휘호한 것을 보면 역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필임에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한호(韓濩)가『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글씨를 씀
'도(陶)' 자(字)를 보면, 좌부방과 도자의 어울림이 어색하고, 쌀 포의 갈고리도 위로 올라간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