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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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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 장원방을 인물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구미시가 2017년도 주요 업무 계획 보고회를 통해 ‘선산 장원방(壯元坊)’을 조성키로 확정했다.
경북문화신문과 경북타임즈는 2015년 11월 11일자 최초 단독 보도를 통해 1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시킨 선산 장원방이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인물공원으로 조성해 인근에 있는 선산청소년 수련원등과 연계할 경우 문화적,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공론화한 바 있다.
■경북문화신문 단독보도 내용
구미시 선산읍 장원방(서당마을)을 출발한 선비들이 과거장으로 향하면서 넘나들던 길목인 마을 뒷산, 장원봉을 인물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선산지역 원로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2006년 직지천변 옛 김천 우시장 자리에 조성된 김천 조각공원 형태의 공원을 밴치마킹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원방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조 숙종 시절,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온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은 바로 선산 읍성 서문 밖 서당마을로 불려져 온 지금의 노상리와 이문리의 장원방에서 비롯됐다. 이 마을에서 불과 70년만에 5명의 장원과 2명의 부장원을 비롯한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시켰기 때문이다.
▶세인의 관심 끌던 장원방
선산읍성 서문 밖, 지금의 노상리와 이문리 일대에 마을이 조성될 당시에는 연꽃과 새들이 많아 연봉이라고 불렸으며, 고려 숭선부 당시에는 태조동이라고 불리다가 선산의 진산인 비봉산의 봉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영봉리라고 불렸다. 바로 이곳에 서당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1388년 고려 우왕 14년에 진시방 병과에 김해부사를 지낸 일선인 김치(년도 미상)가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시작으로 15명의 급제자를 탄생시켰다. 또 1399년 조선조에는 연안인 전가식(1365-1449)이 문과에 장원급제한데 이어 예조 판서를 지냈다.
또 1577년 순천인 김여물(1548-1592)은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했고, 밀양인 박춘보(1694-1748)는 영조 14년에 장원 급제 후 승정원 좌승지와 시간원 대간사를 지냈다. 선산읍성의 낙남류 상량문을 지은 인물이었다.
또 일선인 김성미는 태종때 문과에 급제한 후 군기사 판사를 지냈다. 이맹전의 장인으로 단종 퇴출에 불만을 품고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기계인인 유면은 문과 장원을 했으며, 병조 좌장, 시헌부 지평, 흥해군수를 지냈다. 진양인 하담은 1402년 태종 시절, 문과에 부장원으로 급제했고, 청송군사를 지냈다. 단계 하위지의 부친이다.
일선인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무인방 병과에 급제한 후 함양군수, 선산부사, 이조참판, 형조 판서를 지냈다. 또 일선인인 김종석은 생원에 입격한데 이어 세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과 직강을 지냈으며, 김종직의 동생이다.
하동인 정초는 1405년, 태종 5년에 문과 부장원으로 급제했다. 예조판서, 관찰사, 참판, 좌군 총재를 지냈다. 1436년 공조판서 당시 그 유명한 농사직설을 왕명을 받고 편찬했다. 대제학으로 정인지와 함께 역법을 거쳐 왕명으로 의례문무악장과 삼강행실도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동인 정지담은 1405영 태종 5년,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며, 부사를 역임했다.
일선인 김숙자(1389-1456)는 1419년 세종 원념에 문과에 합격했다. 김해, 고령 현감과 성균과 판서를 역임했다.조선 유학의 맥을 이은 업적으로 유명하다.
또 진양인 하강지는 세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하위지 선생의 형이다.
진양인 하위지(1412-1456)는 1438면 세종 20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단종복원을 도모하다 실패하고 참형을 당했다.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진양인 하기지는 1438년 세종20년에 단계선생과 함께 무오방 병과에 동반 급제했다. 단계선생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