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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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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김정희가『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고 쓴 현판 글씨이다. 그는 1848년 제주 유배가 풀려 1849년 서울에 온지 겨우 2년 반이 되지 않은 1851년 예론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北靑) 땅으로 유배를 받았다. 9년여의 제주도 귀양생활에 이골이 난 그로서는 정반대인 북청에 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오죽했으랴. 이때의 심정이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북청으로 떠날 여비를 겨우 마련했지만 아우 김명희(金命喜)와 김상희(金相喜)는 그 가난한 살림에 어디에서 돈이라도 마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북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돼 뜻밖의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후배이자 뒤에서 이리저리 많은 편의를 봐준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해온 것이다. 적적하던 그에게 윤정현의 부임은 다시 한 번 학구열을 불태우게 했다. 그는 일찍이 권돈인이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옛날 황초령(黃草嶺)에 세웠던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그 비 한 조각을 찾아냈고, 그 탁본을 얻어 금석학연구에 요긴하게 쓴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윤정현은 권돈인 때 찾지 못했던 다른 한 조각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가 북청에 갔을 때에는 권돈인 때 찾았던 비석 잔편을 제대로 보존을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그는 새로 부임해 온 윤정현 관찰사께 특별히 부탁하여 원위치에 비편을 세워 보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윤정현 관찰사는 여러 사정으로 원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에는 세우지 못하고, 그 아래인 중령진(中嶺鎭)에 옮겨 세워놓고 비바람에 견디게끔 비각을 세웠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 윤정현 관찰사는 그에게 이 비각을 짓게 된 내력과 비각에 현판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때는 1852년 8월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명품 글씨가 나오게 된다. 즉 현판『진흥북수고경』이다. 현판에는 아무 관지(款識)가 없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만은 그가 쓴 글씨임을 알아본다.
이 진흥북수고경이란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배운 모든 서체를 최대한 아울러 굳세면서도 강약을 잘 배합하여, 한 글자마다 짜임새가 멋있을 뿐만 아니라 한 점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전체적 조형이 매우 뛰어나다. 한마디로 북청시대 추사글씨의 백미다.
▶김정희가『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현판 글씨를 씀
眞興北狩古竟. 신라의 진흥왕이 북쪽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한 옛 영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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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의『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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