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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황이 옥산서원경내의 독락당(獨樂堂) 정면에『옥산정사(玉山精舍)』란 편액을 쓴 글씨이다. 그는 주자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작은 아버지 이우(李堣)로 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성균관 박사 · 전적,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 충청도 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1546년 낙향하여 토계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재임 중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서적, 학전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 편액 글씨는 동방의 오현(五賢)중에 한분으로 칭하는 이언적(李彦迪)선생의 공부방인 독락당 정면에 걸려 있는 이황이 직접 쓴 친필이다. 조선 중기 도학자를 대표하는 이황은 글씨와 도학을 하나로 봤기 때문에 글자는 곧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한 점, 한 획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4글자의 어울림에 안정감이 있으며, 글자마다 단정하고 맑은 기운이 스며들어 있다. 산(山)자는 키가 낮은 글자이므로 마지막 획을 길게 하여 좌우의 균형을 맞춘 것을 보면서 예사롭지 않은 결구감각을 엿보게 된다. 독락당 첫머리에 이황의 글씨를 걸어놓았다는 것은 영남유학자 이전에 서예가로서 인정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이황(李滉)이 독락당 정면에『옥산정사(玉山精舍)』편액을 씀
玉山精舍. 옥산정사란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0㎝, 세로 3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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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이황의『옥산정사(玉山精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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