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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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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추사가 제자 남병길(南秉吉)에게『유재(留齋)』란 호를 지어주고 쓴 현판 글씨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30년 생부 김노경(金魯敬)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에 그의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시도(詩道)에서도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정도의 수련을 강조하며,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으로 부터 소식(蘇軾) · 두보(杜甫)에 이르는 관심의 폭을 보여준다. 그는 고증학의 경향에 따라 시 · 서 · 화 일치의 동일묘경(同一妙境)을 항상 주장했는데, 화풍 역시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따랐다. 특히 난법(蘭法)은 예(隷)에 가깝다고 보고 반드시 문자향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밖에 대나무와 산수를 표현하는 데 고담하고 아름다운 필선(筆線)을 사용하여 고상한 기품을 드러냈다.
현판 가운데 돋보이는 작품이며 남병길은 훗날 추사의 유고를 모아 담연재시고와 완당척독을 펴낸 인물이다. 이 현판은 그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쓴 것인데, 복각에 복각을 거듭해 원 글씨의 획 맛을 많이 잃었지만, 큰 글씨『유재』는 원 필의를 가지고 있다. 소치실록(小痴實錄)에는 제주시절 작품으로 추사가 제주에 있을 때 써서 현판으로 새겼는데 바다를 건너다 떨어뜨려 떠내려 간 것을 일본에서 찾아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사가 제자 남병길에게『유재(留齋)』란 호를 지어준 현판 글
留齋. 留不盡之巧, 以還造化, 留不盡之祿, 以還朝廷, 留不盡之財, 以還百姓, 留不盡之福, 以還子孫. 阮堂題. 남김을 두는 집. 다 쓰지 않은 기교를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다 쓰지 않은 녹을 남겨서 나라에 돌려주고, 다 쓰지 않은 재물을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 다 쓰지 않은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라. 완당 김정희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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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김정희의『유재(留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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