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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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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황기로가 영주 평은면 금광리에 사는 친구인 사계(砂溪) 장여화(張汝華)의 별서에『전계초당』이란 편액을 썼다. 그는 구미출신으로 본관은 덕산. 자는 태수, 호는 고산 · 매학정이다.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김구(金絿) · 양사언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벼슬은 별좌를 지냈다. 필법이 뛰어났으며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이라 불렸다. 그의 서체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탄 위에 매학정이란 정자를 짓고 필묵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근묵』등에 진적이 전하며,『관란정첩(觀瀾亭帖)』·『대동서법(大東書法)』등에 필적이 모각되어 있다. 저서로『고산집』이 있으나 발견하지는 못했다.
고산은 초서체를 바탕으로 독보적인 광초(狂草)라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한 인물로『전계초당』의 전계(箭溪)는 시냇물이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계는 성균관 진사로 그는 김성일(金誠一)에게 배웠으며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는 곧바로 낙향했다. 그는 전계(砂溪)옆에 초당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그 후 광해군의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던 1621년(광해군 13)에는 곽진(郭瑨) · 김시추(金是樞) 등 동료들과 더불어 이이첨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러 서울에 갔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전계초당』의 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김약련(金若鍊)의 기문에 전하고 있다. 사계는 명필 고산과 막역한 사이로 서당 편액을 부탁했다. '장차 흥이 나면 쓸 테니, 재촉하지 마시라.' 이후 둘은 부석사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하루는 흥이 일었는지 고산이 황급히 말했다. '빨리 종이를 구해 오라.' 그는 붓 대신 칡넝쿨을 씹어 일시에 전계초당 4자를 일필휘지했다. 하나하나 글자의 뜻을 정확히 형성화해냈다. 고산은 스스로도 평생 득의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산은『전계초당(箭溪草堂)』4자를 일필휘지로 씀
하나하나 글자의 뜻을 정확히 형성화해냈다. '箭'자는 화살촉 모양으로, '溪'자는 흐르는 물 모양처럼, '草'자는 풀 모양처럼, '堂'자는 집 모양으로,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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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산 황기로의『전계초당(箭溪草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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