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이열치열이랍니다. 더 열 받는 소리로 지금의 열기를 다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행동경제학의 사전적 해설은 ‘이성적이며 이상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를 전제로 한 경제학이 아닌 실제적인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여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경제학’으로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이 사람이 갖는 여러 사회적, 인지적, 감정적 이유와 편향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학적 현상에 관련이 깊기에 실제의 경제에서 현실과의 괴리를 보이면서 다양한 인간의 심리에 관련된 실험 연구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것’이지요. 2002년 대니얼 카너먼, 2017년 리처드 탈러는 행동경제학의 제기와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즉 행동경제학이 지금의 경제학의 대세이고 이는 분명하게도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논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에 뿐 아니라 ‘행정의 미래’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도 행동경제학의 논의는 지속됩니다. ‘행동주의 경제학, 데이터 분석, 게임이론에 기반을 둔 정책 접근’이라는 부제가 달린『행정의 미래』(박광일 저, 렛츠북, 2018)라는 책의 발간과 더불어 그 내용으로 강연하는 자리에서 저자는 지금의 행정 문제를 두 가지 원인으로 제기합니다. 현직 행정 관료로 행정에 대한 자기반성 차원에서 직접적인 문제점을 제기한 것입니다. 첫째는 ‘윤리적 문제로 행정이 이익 집단화되어 더 이상 사회정의 실현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과 ‘둘째로 시스템적 낙후성으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의사결정 체계와 조직운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지금 우리나라의 행정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추구하지도 않고 이는 시스템의 낙후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즉 휴리스틱이라는 말을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관습에 따라 진행되어온 행정의 모습에 대해서 ‘데이터 기반 행정이 행정의 새로운 비젼이다’이라고 규정하고 ‘행동주의 경제학 관점으로 정책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와 ‘데이터 과학이 정책 대상에 대한 올바른 타게팅을 가능케하고, 의사결정과 성과분석을 돕는 커다란 역할을 함’을 제시합니다. 또 ‘정부가 복잡하고 난해한 서식을 유지하는 이유가 정부가 국민의 만족과 반응에 둔감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으로 ‘편승효과(band wagon), 기준점 효과, 현상유지 편향(디폴트값의 중요성), 프레이밍 등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다양한 현상을 연구하고 행정에 접목’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행동경제학의 사상적 내용의 접목은 사회정의 실현과 공무원 조직의 원활을 위해 반드시 도입되어야 할 사안이라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는 지금,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의 답이 될까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에서부터 문제는 제기됩니다만. 우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4차 산업혁명은 순 개뻥이다’.(2016 재료연구소에서의 강연)라고 말을 기억합니다. ‘산업혁명’이 아닌 ‘지식 혁명’이라고 규정합니다. 연결해서 ‘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클라우스 슈밥은 참으로 창의적인 사람.....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컴퓨팅, 자율주행, 3D 프린팅, 인공지능 등과 4차란 숫자를 편집해 느닷없이 세계적인 석학(!)으로 거듭났기 때문.....학자라기보다는 비즈니스맨 .....유럽에 미국식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을 소개...... 1979년부터는 매년 국가들의 경쟁력 순위를 매기는「세계경쟁력보고서」를 출간’하여 부와 명예를 얻은 것이지요. ‘클라우스 슈밥은 바로 이 같은 독일에서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되던 인터스트리 4.0을 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으로 살짝 바꿔 다보스포럼에 소개하였고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즉 4차 산업혁명은 막다른 길에 몰린 독일 제조업의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제시된 인더스티리 4.0에서 끌어낸 개념으로 한국에서 회자되는 것처럼 ‘혁명적 미래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을 4차 산업혁명의 시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제기되는 셈이지요.
그런데....그런데 말입니다.
『호모 이코모미쿠스의 죽음』(피터 플레밍 저, 박영준 역, 한스미디어, 2018)에서는 ‘행동경제학이 무서운 이유’라는 챕터(P163 이후)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이런 심리 게임 뒤에 자리한 반 심리학은(사실 부자들은 행동경제학 이론에 절대 좌우되지 않는다) 빼았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착취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또한 빈곤의 책임을 실패한 경제 행위자에게 떠넘기는 역할도 한다.’고 지적하고 구체적으로 리처드 탈러에게 도마 피케티의 경제적 불평등이론에 대한 질문과 그 답에서 나온 정치적 무지, 넛지 유닛이 영국의 보수당 정권으로부터 받은 의무가 평범한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잘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임을, 그러면서도 구글, 아마존, 스타벅스 등의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엄청난 돈을 숨길 수 있게 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행동주의 경제학은 시카고학파의 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기업의 이윤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지적과 논리적 평가에 대하면서 과연 행동 경제학에서 말하는 넛지며, 최후통첩 게임 등이 힘없는 백성, 서민이라 표현되는 대 다수가 돈이 많아 법도 피해가고, 정치를 주무르며, 갑의 자리를 만끽하는 소수를 위해 더 쉽게 요리당하기 위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4차 산업혁명의 시기라 함 자체도 지극히 비즈니스 적인 요소(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운운하는 말의 성찬)에서 비롯된 시기규명이면서 행동경제학이 과연 정치나 행정 등 모든 면에서 내용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서 하나라도 더 빼앗아 가진 자에게 얹어주는 신자유주의의 발달된 모습이기에 지금(지식혁명시대 이전 끝까지 간 양극화의 시기)의 답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코노미쿠스의 죽음’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외침 ‘노동자여 단결하라’ 대신에 ‘99%여 단결하라’ ‘더 이상 1%에게 속지마라’라는 구호가 더 갈급한 것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