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선산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주목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절터와 석탑, 불상, 석등 등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많은 불교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다. 한 지역에서 이렇듯 조밀한 불교유적의 분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다. 본지에서는 신라 불교가 전래된 성지로서 구미·선산 불교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를 간직한,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사찰을 둘러본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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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화상의 참선처 좌선대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로 불교를 전파하면서 가장 먼저 세웠다는 도리사(桃李寺). 대부분의 사찰은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법당이 나오는데 도리사는 일주문과 법당까지 5km남짓으로 꽤 많이 떨어져 있다. 일주문에서 법당까지 이르는 거리는 나무터널처럼 가로수 길이 펼쳐져 여름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가로수 길에 취해 달리다보면 어느새 냉산 자락에 위치한 도리사에 도착한다. 냉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산성을 쌓고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데서 유래된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은 특히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바람이 잘 들지 않아 따뜻하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복숭아와 오얏(자두) 꽃이 만발했을까. 아도화상은 겨울에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복숭아(桃)와 오얏(李)을 뜻하는 도리사(桃李寺)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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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의 입구에 들어서서 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도의 어머니인 고구려 여인 고도녕과 중국의 사신인 아굴마의 이름표가 붙어있는 차방과 템플스테이를 위한 방이 보인다. 아도라는 이름은 아버지 이름의 ‘아’와 어머니 이름의 ‘도’자를 따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사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도화상 좌선대다. 도리사석탑 옆으로 난 쪽문으로 내려가면 아도화상 좌선대가 나온다. 널찍한 암석을 4곳에 배치하고 그 위에 소형 지석으로써 광대한 널찍한 암석을 지탱하고 있다. 이 사각 대좌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낙동강이 굽이 흐르고 팔공산과 유학산이 멀리 보인다. 이곳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현지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도화상의 좌선처로 당연히 지목될 수 있는 곳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 굽이치는 낙동강과 넓은 해평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좌선대에서 참선하는 아도화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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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례, 도리사 창건 일등공신이자 아도의 첫 신도
전설에 따르면 아도가 5세 때 어머니에게 자신은 왜 남들처럼 아버지가 없냐고 묻자 어머니는 사실 아버지는 중국의 훌륭한 장군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16세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중국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3년 동안 불교공부를 한 후 불교가 공인되지 않았던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온다. 무엇이든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항상 앞 사람의 희생이 따르는 법.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아도가 오기 전에 다른 스님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도화상은 도개의 모례의 집에 가서 동굴을 파고 그 안에서 생활하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불법을 전했다. 그러다 모례에게 집안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아도는 홀연히 떠난다. 한겨울 모례네 집에 굵은 칡이 마당까지 들어와 모례는 이를 신기하게 여기고 칡을 따라갔다. 도리사의 아도화상의 좌선대까지 이르게된다. 이곳에서 아도와 모례는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고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를 짓게 된다. 모례는 도리사를 짓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자 아도의 첫 신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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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대 뒤에는 유형문화재 291호인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가 위치해 있다. 사적비는 효종6년(1655)에 건립됐다. 자연 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세웠으며 머리 앞면에는 쌍용을 뒷면에는 4룡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는 운용을 조식해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불량탑을 시주한 사람과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숙종38년(1712)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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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진신사리 모신 적멸보궁극락전 앞마당의 모전탑인 석탑(보물 제470호)도 눈여겨 볼만하다. 법당 앞에 탑을 정면 배치한 도리사의 가람배치는 다른 사찰과는 다르다. 이는 법당 앞에 공간이 없다보니 현재의 위치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사의 석탑은 3층인 것 같으면서도 5층인 듯 애매하다. 이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석탑으로 불리는 것이다. 또 2년 전 해체 보수했는데 아무것도 나온게 없었다. 이렇다보니 조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돌을 다듬는 수법 등을 통해 고려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보수를 하면서 함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는 먼 훗날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현재의 도리사에 대한 인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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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위에 위치한 세존사리탑은 조선시대 유행했던 석종형부도로서 탑신 상단 부에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사리탑은 원래 삼성각 돌담 바깥쪽에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 도굴꾼들에 의해 계곡에 도괴됐던 것을 수습해 현재의 위치에 봉안한 것이다. 1977년 사리탑을 봉안하는 과정에서 탑신의 하면부를 조사하다가 금동사리함이 발견됐다. 또 금동사리함내에서 사리 1과를 발견했는데 사리 용기는 없고 다만 천과 문종이들이 삭아서 함께 엉켜져 있었다고 한다. 고증을 통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로 인정을 받으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인 적멸보궁사찰로 인정을 받았다. 금동사리함은 현재 아도화상의 초상화 등과 함께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세존사리탑 옆에는 불교가 전파되면서 칠성신, 산신, 독성신 등 토속신앙을 모신 삼성각이 위치해 있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은 법당보다는 이곳을 먼저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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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태조선원 가장 오래된 건물
도리사에서 빼놓고 않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태조선원이다. 극락전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태조선원은 학습공간으로 야은 길재를 비롯해 대전 이남에서 이름난 학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학습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편액은 독립운동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 선생이 쓴 글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의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춰 댄 나무쪽인 포가 화려하다.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아무래도 화려하려면 무겁기 마련. 그래서 무게중심인 기둥을 뒤로 두고 있다. 이는 고려후기 양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 고궁이나 사찰의 목조건물 서까래에 으례 있는 단청은 화려한 오방색을 자랑하는 다른 것과 달리 히끗히끗 자연스럽다. 그래서인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람 사는 곳에는 하지 않고 귀신 사는 집에만 한다. 하지만 궁궐에서도 단청을 볼 수 있다. 임금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늘과 동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또 처마가 이중인 겹처마로 되어 있어 옆의 건물인 태조선원과 건축양식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태조선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인데다 홑처마로 되어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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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대의 기록과 현지 조사에서 얻어진 유적과 유물, 현지의 전설을 등을 종합해보면 현재의 구미시 도개면(桃開面) 도개(桃開)2리가 신라시대 도개부곡(桃開部曲)으로서 모례라는 사람의 집이 있었고 여기에 고구려로부터 아도화상이 와서 굴실을 마련하고 신라의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불도(佛道)를 열었다는 뜻으로 도개(桃開)의 ‘開’자를 쓰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구미·선산지역의 불교」(정영호, 1997)
도움말 이영희 문화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