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선산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주목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절터와 석탑, 불상, 석등 등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많은 불교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다. 한 지역에서 이렇듯 조밀한 불교유적의 분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다. 본지에서는 신라 불교가 전래된 성지로서 구미·선산 불교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를 간직한,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사찰을 둘러본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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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사찰로 잘 알려진 문수사. 바위에 뚫린 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종교적 의미가 부가된 석굴사원에 대한 관심으로 문수사를 찾았다. 석굴사원으로 알려진 경주의 석굴암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돌을 다듬어 쌓아올려 축조한 인공굴이다. 하지만 이곳 문수사는 암벽이나 토벽을 파고들어가 만든 자연석굴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석굴사찰, 아니 석굴을 구미에서 볼 수 있다니... 가히 자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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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얼굴 연상시키는 사자암 구미에서 상주방면으로 산업도로를 따라 20여분쯤 달리다 도개면에 들어서면 신곡리 청량산 중턱에 병풍처럼 둘러친 암벽이 보인다. 문수사가 위치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농촌 들녘을 감상하면서 도착한 문수사. 염불소리가 아닌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아기자기한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과 이를 감싸고 있는 푸른 청량산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첫인상이 포근하고 편안해서인지 문수사는 굳이 불자가 아니어도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석굴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로 사자암에 올랐다. 암벽에 박혀 있는 듯한 절의 모습은 자연암벽의 굴속을 이어 전각을 지은 그야말로 반쪽짜리 집이다. 그렇다면 법당 안은 어떤 모습일까. 사후전(獅吼殿)이라 붙여진 법당 안에 들어서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바위굴로 되어 있는 커다란 동굴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바위는 군데군데 돌이 박혀있는가 하면 움푹 들어가 있기도 하는 등 자연그대로다. 밖에서 바위를 따라 넝쿨을 타고 들어왔는지 가장자리에는 담쟁이 넝쿨 줄기가 바위를 감싸고 있다. 법당의 이름이 대웅전이 아닌 사후전(獅吼殿)이라는 것을 법당을 나온 후에야 알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웅전 대신 사후전(獅吼殿)을 두고 있는 사찰이란다. 우렁찬 사자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사후전은 산새가 사자의 형상으로 사자 입에 부처님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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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입구의 석탑 도괴, 현재 탑재만 남아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 문수사는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법당 한쪽에 자리 잡은, 석굴입구에 있었다는 석탑 탑신부의 부재를 통해 옛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탑재(塔材) 등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본래 이곳은 납석사(納石寺)라는 옛 사찰지(寺刹址사)로 전해오고 있다. 일선지(一善志) 불우조(佛宇條)에 “납석사는 신곡 문암사 북쪽에 있는데 절 뒤에 석굴이 수칸이 된다(納石寺 在斷谷門巖北 寺後有石窟 谷屋數間 납석사 재단곡문암북 사후유석굴 곡옥수간)고 기록돼 있다. 이곳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또 조선 초까지 납석사가 존재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자연동굴이 있다하여 '굴암골'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곳에는 석탑이 있었는데 일정강점기 말기에 괴한이 석탑을 파괴해 내부의 보물을 도굴해 갔으며 이로 인해 석탑은 방치되어 있다가 굴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 때 이들 탑재를 파괴해 사용했으므로 남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석탑부 조각과 절 경내 입구에 ‘청량산 문수사’라고 표석이 탑재로 남아 있어 이곳에 석탑이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보이고 있다.
그 뒤 폐허화됐던 것을 최근에 석굴 아래쪽에 사후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을 문수사라 개칭했다. 사자암의 불상은 창건 당시 문경시 대승사(大乘寺)에서 옮겨온 불상과 4폭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3폭의 탱화는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뒷벽에 걸려 있는 산신탱화는 ‘대청동지 12년 계율 6월일 동학사 미타암’이라는 탱화 조성 기록이 있다. 이는 곧 계룡산 동락사 미타암 산신탱화로서 1873년(조선 고종 10)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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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멸 심하지만 조각 수려한 선산궁기동 석불상사자암을 내려오면 왼쪽의 미륵불전 옆 터에는 궁기리 석불상 2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원래 궁리2리 부처골에 있던 것인데, 1973년에 발견돼 주민에 의해 도개중로 옮겨졌고, 학교 증설로 인해 2008년 1월 10일 다시 문수사로 옮겨진 것이다.
오른쪽에 위치한 보살상은 광배(光背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와 대좌(臺座)가 하나의 돌로 이뤄졌는데 현재 광배의 윗부분과 머리 부분이 깨진 상태다. 따라서 상호(相好 부처의 용모) 각부의 표정 등은 알 수 없다. 얇게 입혀진 천의(天衣 옷)의 각선도 많이 마모됐고, 양손, 오른쪽 무릎과 대좌의 일부도 파손됐다. 그러나 전체의 형태를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았는데 꽃가지를 받치고 있는 듯하다. 천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사각형의 대좌 앞면에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광배에는 덩굴무늬·연꽃무늬·불꽃무늬·화불 등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광배 뒷면에도 비로자나불좌상이 선으로 새겨진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불상은 조각이 수려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20호로 지정됐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통일신라 때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위치한 보살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있고, 법의(法衣 승려가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통견(通肩어깨에 걸침)이며 정제된 자세이다. 연화대좌의 표현 등에서 조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고려시대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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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문수사에서 꼭 가보야 할 곳은 사자암 아래에 마련된 셀프차방이다. 한쪽은 암벽, 다른 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물론 누구든지 다양한 차를 가져와서 마실 수 있다. 또 거대한 암벽에 사람이 조각해놓은 것처럼 사자의 얼굴이 있다고 하니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전망대에 오르면 도개면의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문수사는 와인과 음악이 무료로 제공되는 문화행사인 산사와인음악회로도 유명하다. 아름드리 소나무로 둘러쌓인 산사 내 공연장에서 재즈, 국악,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 장르의 공연을 즐기며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최근 문수사는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지친 심신을 달래고 쉴 수 있는 산사로 지역에서는 물론 인근 상주, 김천, 대구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참고문헌] 『교남지』, 『일선지』, 『선산지역 고적조사보고서』, 『구미사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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