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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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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고 4개월쯤 뒤에 이 책을 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예견한 듯,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책이 시의적절하게 출간됐다는 게 책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면역력 강화식품인 홍삼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첫 인상과 달리 25년간의 집요하고 치밀한 연구 끝에 인삼의 세계사적 의미, 역사를 되살려냈다. 묵직했다.
2년이 지난 현재, 이 책을 다시 환기시켜 본다. 당시에는 참 열심히 읽고 썼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책의 인상
‘인삼의 세계사’ 연구는 25년 전 우연에서 비롯됐다. 서양사학자인 저자 설혜심은 1995년 어느 여름날, 건강보조제 전문매장인 미국의 한 쇼핑몰에서 본 ‘아메리칸 진생 페스티벌’의 인삼이 한국인삼이 아닌 미국인삼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인삼은 한국 고유의 산물이라 여겼는데 어디에서도 고려인삼, 한국인삼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저자에게 ‘미국인삼’은 숙제처럼 남았다. 그러다 2013년 19세기 영국 소도시에서 발간된 신문기사를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에서 200개가 넘는 한국인삼을 다룬 기사를 발견하고 인삼을 언급한 서양 문헌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저자는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인삼이 이미 17세기부터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에서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그렇게 중요한 인삼을 왜 서구 역사학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서양 문헌 속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의학논고부터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경제학, 논고, 식물학서, 지리지, 여행기, 박물지, 신문기사, 서신, 사전, 소설, 시,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과 현장 답사, 인터뷰 등을 통해 세계사 속에서 인삼의 역사를 되살렸다.
무엇보다 인삼을 매개로 세계사를 들여다본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백제의 대표적 유적인 부여 정림사지는 나에게 한국전쟁 때 개성인삼 종자를 묻어두었다는 설화가 깃든 장소가 되었다. 영국의 민싱레인은 중국과 인도에서 건너온 차의 거래소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 거리의 이름을 들으면 보관료를 내지 않아 차압된 북미삼 인삼통이 쌓여 있는 광경을 떠올리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깊이 공감됐다. 익히 알고 있던 역사에서 숨어 있는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신선한 기쁨일 것이다.
또 서양의 역사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인삼에 대한 기록을 지역신문에서 찾았다는 것에서 지역신문의 역할,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다. 미시사에 관심이 많은 저자에게 소규모로 발간된 지방지가 아주 매력적인 자료였다는 것이 특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서양에서 인삼의 인식
서양 사람들은 언제부터 인삼을 알게 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인식했을까. 고려인삼이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617년 일본 히라도 주재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 리처드 콕스가 런던 본사에 인삼과 함께 보낸 통신문이다.
중개인을 통해 희망봉에 어떤 뿌리를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너무 말랐고 아무런 성분이 남아있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냅니다. 여기서 이 뿌리는 은과 맞먹는 가치를 가지는데, 너무 귀해서 보통 사람의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쓰시마 번주에 의해 무조건 일본 천황에게 보내집니다. 이곳에서 이 뿌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 (pp.25~26)
통신문에서 고려인삼이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소개됨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그곳에서 다시 런던으로 향하게 되었던 인삼은 유럽의 해외 팽창,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결과물이었다.
저자는 또 인삼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으로 예수회의 활동에 주목했다. 예수회는 선교뿐 아니라 유럽에 해외의 지식과 기술을 들여오고 동서양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회가 부지런히 실어 날랐던 중국에 대한 정보들, 특히 인삼에 대한 정보들이 당시 유럽의 지식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당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인삼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로크(...)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기록한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그 일기에서 인삼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1683~1689)을 하던 중 보임의《중국 의학고찰》(1682)을 읽고 인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 같다. 로크는 인삼이 아시아에서 열병과 성병 치료제이자 강장제 기능을 한다는 노트를 남겼다.(p.56)
라이프니츠(1646~1716)의 사례는 예수회와 중국, 그리고 인삼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1689년 라이프니츠는 예수회 신부 클라우디오 필라포 그리말디(1638~1712)에게 “인삼 뿌리가 그렇게 큰 칭송을 받을 만큼 효능이 좋은가?”라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미적분을 발견한 수학자로 유명한 라이프니츠가 인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유럽의 지적 지형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pp.56~57)
서양의 인삼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게 될 문헌으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로 중국에서 활동한 피에르 자르투의 보고서를 꼽을 수 있다. 자르투가 만주에서 인삼을 직접 본 뒤 작성한 보고서는 1716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또 다른 인삼(화기삼)을 발견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중상주의 기치 하에 유럽 엘리트들은 인삼을 귀중한 자원으로 주목했으며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왕립과학원은 인삼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다. 영국 왕립학회 창간호에 인삼에 대한 논문이 실렸다는 것은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인삼에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인삼은 영국 최고의 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친숙한 주제가 된 것이다. 또 프랑스 왕립과학원은 시암 대사가 루이 14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인삼을 진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삼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됐다. 1697년 부르들랭의 인삼에 대한 소고가 프랑스 인삼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이어 1736년 파리의과대학의 뤼카 오귀스탱 폴리오 드 생바스가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를 제목으로 유럽 최초로 인삼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1842년 최종적으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는 고려인삼의 학명이 결정되기에 이른다. 또 실제 의료에 사용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양이 인삼을 은폐한 이유
세계상품으로서 인삼이 동아시아라는 중심부와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주변부의 이중구조 속에서 유통됐다. 한국-중국-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조공과 교역의 형태로 인삼의 유통이 이뤄지고 있었다. 17세기 초 영국은 주변부 인삼 교역마의 패권을 쥐게 됐지만 미국이 독립한 후 독자적으로 인삼 무역에 뛰어들면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중국을 상대로 마땅한 수출 상품이 없었던 미국에서 인삼은 최초의 수출품이자 최고의 상품으로 자리매김한다.
18세기 후반부터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세계상품 자리를 차지한 인삼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서구 의학학계에서 인삼의 위상을 축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들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약전의 개혁이었다. 18세기 후반 유럽 여러 국가는 난립한 약전을 통합하고 공식적인 승인을 통해 국가차원의 약전을 편찬하는 약전개혁이 본격화 됐다. 1818년 프랑스에서는《프랑스 총약전》이 국가승인을 받게 됐고, 미국에서는《미국 약전》(1820)을 출간했고 영국은《영국 약전》(1864)을 내놓았다. 이처럼 개정된 약전은 기존 약전에 포함됐던 많은 식물을 배제하는 동시에 식물의 전반적인 특성을 개괄하기보다는 커피에서 카페인을, 아편에서 모르핀, 담배에서 니코틴을 추출하는 식으로 유효성분만을 기록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약전의 개혁 과정에서 인삼은 약전에서 제외되거나 효능이 폄하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서구 과학계가 인삼에서 효능을 입증할 만한 유효성분을 찾아내지 못했던 탓이다. 서구 의학계가 인삼의 유효성분 추출에 실패한 데에는 무엇보다 실험대상인 인삼, 즉 샘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험을 위한 샘플의 질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 의학사에서 인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근대 유럽과 미국이 의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인삼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양 역사학에서 인삼을 다루지 않았던 원인을 문화적 원인에서 규명하고 있다.
인삼이 처음 유럽에 들어왔을 때 유럽인들은 이 낯선 식물을 어떻게 이해할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인류학과 역사학은 한 집단이 다른 문화와 충돌할 때 나타나는 반응을 흔히 ‘유비’와 ‘대립화’라는 두 범주로 풀이해 왔다. 여기서 유비란 타자를 자신 또는 자신의 이웃에 동화시키기 위해 문화적 거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인식의 대상이 인식 주체의 반영물로 취급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런 인식체계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의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주체의 상상력 속에서 재단된 어떤 것이 된다.(p.339)
인삼을 접한 유럽인의 첫 번째 반응은 유비였다. 그들은 인삼을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던 식물인 맨드레이크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맨드레이크는 인삼과 마찬가지로 약용 식물이지만 사람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삼이 맨드레이크와 비슷하다는 인식은 아주 오랫동안, 심지어 동서양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두 식물의 공통점을 찾아 나란히 비교하는 일은 인식 주체가 자신에게 인한 인식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문화적 태도였다.
유럽에서는 인삼을 두고 유비보다는 대립화해가는 경향이 짙었다. 인삼의 자생지가 유럽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며 거리두기를 하고 배척해 간 것이다. 그 과정은 먼저 유럽 문화에서 부덕으로 규정된 특성을 인삼에 투사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인삼을 자신들과 다른 세계인 중국이라는 이방의 영역에 온전히 묶어두면서 인삼에 사치, 방탕, 전제성, 계급성 비합리성 등 부정적인 요소를 덧칠해갔다. 인삼은 서양과 동양의 ‘다름’을 드러내는 대상일 뿐 아니라 때로 서양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인삼을 둘러싼 담론은 ‘신비한 동양의 만병통치약’과 근대 서양 의학에 포섭되지 않는 ‘불가해한 ’ 효능 사이의 길항 관계를 보여준다. 인삼의 생산과 수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서양이 인삼을 타자화하게 된 배경에는 인삼 가공 기술에서 동아시아에 결코 범접할 수 없다는 열등감과 내다 팔기에 급급한 나머지 내수화는 요원했던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또 정량을 결코 도출해낼 수 없었던 ‘표준화 중심적’인 서양 의학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는 이 한계들이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포장되어 서구의 산물에는 우수성을 부여하면서도 스스로 그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양의 산물에는 낙후성을 덮어씌우는 자기모순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았다.
서양은 유달리 인삼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소비집단, 즉 중국인과 연결해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왔다. 그런데 비단 소비자만이 아니었다. 인삼을 생산하는 사람들, 즉 심마니에 대해서도 유달리 강력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해왔다. 여기서 그런 시선이 중국의 심마니에 그치지 않고 자국인인 아메리카 대륙의 심마니에게도 투사되었으며 그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p.374)
동양에 대한 동양의 물건인 인삼에 생계를 걸고 있는 미국의 심마니들은 오늘날까지도 내부적 식민지인이나 마찬가지다.
E.H.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대화'를 다시 떠올리다
인삼을 범지구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현재에 힘주어 발을 딛고서 역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p.11)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삼은 여전히 열등하고 비합리적인 동량성에 갇혀 있다. 이 지점은 동아시아가 구심점인 인삼의 세계-경제체제와 이를 부정하고 싶은 서구중심주의가 지나하게 충돌해온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런 충돌로 부조화로 인해 서구 역사학은 인삼의 존재를 은폐할 수박에 없었던 것이다.(p.427)
서구 역사학에서 인삼의 존재를 은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열등감이다. 인삼가공기술 등 인삼의 중심이 될 수 없었던 열등감이 작용한 것이다. 인삼의 세계사는 의약학의 성패가 의약적인 효능뿐만 아리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좌우된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사례다.
수많은 문헌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서구 역사학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인삼에도 서구의 제국주의가 투영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