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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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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기에 소설책이 안성맞춤이다. 주말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를 다시 읽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편안한 읽기의 줄거움인가.
책을 덮고 인연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우연이라기에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일까. 아니면 하느님(하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마리너스 수사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만남(인연), 그 중심엔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도회 수사인 정요한이 있다. 뱃속에서부터 카톨릭 신자였던 정요한은 할머니로 인해 왜관수도원에 오게 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 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 뒷장에서 이미 자신의 주거지가 될 왜관수도원(분도출판사 운영)의 주소를 확인했을지도.
북쪽에서 태어난 요한의 할머니는 대대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랐고, 수도원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할머니는 일본 식민지하에서는 아나키스트였다가 공산주의자였던-예수님의 초상을 떼고 그 자리에 김일성의 초상을 붙인 부류- 할아버지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아이도 가졌다. 가족 몰래 도망쳐 나와 결혼하기로 한 그 해 여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피난 행렬이 남으로 이어지던 겨울, 할머니는 만삭의 배를 안고 그 행렬에 합류해 흥남에 도착했다. 흥남부두에서 1만4천명의 피란민을 태운 빅토리아메러디스호에 오르지만 피란민을 받는 통역을 했던 할아버지는 쌍둥이 어린아이들을 마지막으로 태우느라 자신은 끝내 배에 타지 못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특별대우를 받았던 할머니는 선장실에서 요한의 아버지를 출산했다. 피란선은 거제도에 도착했고, 카톨릭 신자였던 선장은 갓 나은 아이를 안고 부둣가에 서 있는 할머니에게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요한은 왜관수도원이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자리에서 할머니에게 들은 흥남철수의 똑같은 이야기를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에게 듣게 된다. 피난선 빅토리아마리너스 호의 선장이 마리너스 수사였던 것이다. 할머니와 맞닿아 있는 인연, 천지창조의 비밀을 엿본 것처럼, 자신의 시원(始原)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벅차오름을 요한은 느꼈다. 어쩌면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곳으로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쇠락해가는 뉴튼 수도원을 마리너스 수사가 구출한 한국사람, 왜관 수도원이 인수한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인연이 이렇게도 얽혀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운명인가.
내가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것도,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이 책 첫 장에 남긴 ‘불현듯 카톨릭이 궁금해진다’를 보면서 생각한다. 카톨릭(교회사) 전공자이기도 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우연일까.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돕고 있었고, 이곳으로 향해 있었다. 인연들도. 지인들과 운명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난 ‘관심사에 따라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고 텔레파시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질 뿐 정해진 운명은 없다. 나의 생각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는 나의 인연을 순간순간 소중하게 대해야겠다는 것이다.
요한 할머니의 흥남철수 이야기에서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눈보라가 치는 그 겨울 흥남부두에 몰려왔던 엄청난 피란민들, 배를 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피란민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끝내 배를 타지 못하고 가족을 태운 배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덕수(주인공 황정민) 아버지의 모습은 요한의 할아버지와 닮아있었다. 영화를 다시 보았다.
또 식탁위의 액자에 담긴 백석의 시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다시 맘속에 다가온다. 책에서 요한이 사랑에 빠진 소희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시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쳤던 것을 다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다.
책에서 마음에 박히는 문장을 적어본다. 마리너스 수사가 한 말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 미리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을요."(p355)
“서로 돕는 배는 난관을 이겨냅니다...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약하고 모자라니까요."
(pp34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