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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원 구미시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추진단 코디네이터⋅선주문학회 고문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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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은 쉰여 가구에 여든 넘은 어르신들이 열댓 분 정도인데 하루 종일 마을회관 주변에서 시간을 보낸다. 유모차에 의지해서 혹은 전동차를 타고 공터로 나오신다. 좀 움직임이 나은 분은 자주 집을 왕래하고 얼마간의 수입이 생기는 회관 청소를 맡아 하기도 한다. 오전에는 주로 정자에서 소일하다가 볕이 강한 한낮엔 회관 안에서, 해가 기울쯤 해선 회관 앞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서 이따금씩 서로 얘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보통은 회관 앞쪽에다 시선을 붙박고 계신다. 오르내리는 자동차나 경운기, 하루 서너 번 들락거리는 마을버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다 차를 세우고 인사라도 건네면 모두 한마디씩 얹는다. ‘밭에 가는가?’ ‘어데 갈라고?’ ‘담뱃집 큰 사우네.’ 늘 같은 말들이 오가고 몇 분은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신다. 여늬 마을보다 행사가 많고 강좌도 자주 열리는 편이지만 그것도 그때뿐이고 어르신들에게는 여전히 무료한 일상이 지배하는 시간들이다.
‘마을’이란 단어도 살갑지만 ‘마실’은 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말이다. ‘마실’보단 ‘마실 가다’란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네의 이웃으로 놀러 다니는 일이란 의미로 쓰였지만 지금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 옛 정서가 사라지면서 마을이란 말도 빛이 바래거나 의미가 변화되어 간다고 볼 수가 있겠다. ‘~촌’이나 ‘~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마을이란 이름을 도시에서는 ‘개발된 특정 지역’에 붙이다 보니 고유한 정감에서 더욱 멀어진 느낌이다. 그렇다고 쓰임 자체를 폄훼하거나 할 요량은 아니다. 다만 무개념하게 쓰이다 보니 어휘에서 풍기는 고유한 정서가 사라진 듯해 아쉬울 뿐이다.
이른바 마을이란 이름으로 정겹게 살아가던 삶의 터전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 상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드물고 더구나 국가에서조차 잃어버린 보물을 적극적으로 되찾을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우리도 살고 우리 뒷세대들도 살아가야 할 마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유럽이나 일본의 좋은 사례들을 수입해서 농촌에 이식하려는 노력을 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농촌의 인구감소와 초고령화, 양극화의 문제가 더욱 깊어 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정책의 방향이나 실행이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 농촌의 현실에 맞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게 아니라 임기응변적이고 일회적인 사업만 반복하다 보니 농촌의 실질적인 변화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고령자 중심으로 살아가는 농촌 마을을 대상으로 보조사업 공모는 계속되고, 주민주도 상향식을 강조하면서도 모든 것을 컨설팅 기관에 의존하도록 하고 있다. 주민들이 역량을 키울 기회는 막아 놓은 채 일방적 ‘교육’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수도 없이 많은 정책이나 사업이 마을에서는 따로 국밥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민자치, 마을 만들기, 마을 가꾸기, 영농교육, 푸드플랜, 강좌 등 일상의 여러 활동은 결코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런데도 행정에선 자신의 입장만 앞세워 따로따로 시행하다 보니 피로감도 들고 주민들 사이에선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하여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마을의 내부는 여러 가지 문제와 이해관계가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것 같아도 풀기가 힘들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이 존재한다. 이를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평가⋅재단하는 이론가와 행정가는 많지만, 직접 현실에 뛰어들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마을이나 성공적인 마을, 잘된 마을, 우수한 마을은 끊임없이 양산되고 홍보를 하고 있다. 좋은 사례가 많은데도 왜 일반화의 길은 멀고 농촌 마을의 위기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활동가나 행정의 규격화 된 지원만으로 마을이 존립해 나갈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수없이 많은 담론이나 연구 성과는 마을 밖에서는 아주 유용할 것이지만 농촌이나 마을 그 안에는 제각각의 삶의 편차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같은 병을 앓는 형제가 같은 약을 먹는다 해도 몸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르게 진행되듯 마을도 매한가지라 생각된다. 마을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를 몇 가지 정해진 항목에 맞추어 점수 매기는 방식으로는 결코 마을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마을엔 마을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보지 않고, 문제에 따른 해解를 구할 생각은 않고 왜 소멸만을 얘기하는 것인가. 지금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가. 마을의 필요를 왜 행정이나 정책에 끼워 맞추려 하는가. 마을의 필요에 맞게 행정 서비스를 조정해 줄 수는 없는 것인가.
주민자치를 입안한 행안부 공무원은 필시 ‘낮은 민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다른 부처에서 국민을 바라보는 눈도 거의 비슷하겠지만. 수십 년째 주민자치 없는 지방분권이 진행되고 있다. 주민이 미덥지 못해 주민자치를 도와주지 못할 양이면 예부터 내려오는 계契를 생각해보면 된다. 계칙이나 재정, 모임 등 어느 것 하나 스스로 못해내는 것이 없었다. 공연히 주민의 팔다리를 묶어놓고 건성으로 자치를 얘기할 게 아니라 그냥 풀어 놓으면 될 일이다. 가난을 벗어나려는 희망이 어언 자본에 예속되어 위기를 맞게 된 지금,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건강한 삶을 되살리는 일이 중요하다. 마을의 일들은 삶을 토대로 하기에 거창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소소하고 때로는 하찮게 보이는 일들도 많다. 작지만 그래도 괜찮은 일들이 일상으로 행해지고 거기에서 얻는 결과들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 마을이지 않은가. 다들 소멸을 말하는 농촌의 마을, 오늘도 정자에 앉아계신 어르신들에게 아는 척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