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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시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추진단 코디네이터⋅선주문학회 고문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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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빗소리에 잠이 깼다. 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린다고 했던가. 천둥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지붕을 쓸어내리듯 빗소리가 요란하다. 습도가 높은 날이 계속되니 여기저기에 노래기가 슬슬 기어 다닌다. 흰 벽면에 붙어 있는 놈은 즉각 눈에 뜨이지만 바닥과 천장에서도 이따금 발견된다. 보이는 대로 휴지를 둘둘 말아 엄지와 검지의 힘으로 빠르게 압착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출몰 초기에 아내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적응이 되어 나보다 잡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러면서 애써 한마디 한다. 올해는 노래기 순서인가 보라고. 해마다 선을 뵈는 벌레나 곤충의 종류가 바뀌니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바깥보다 집 안에 나타나는 횟수가 잦으니 은근히 걱정은 되는 눈치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바닥에 물기가 번져있다.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또 한 방울 톡. 톡. 이층 세면장에서 새어 들어와 떨어지는 물방울이 분명하다. 얼마 전 실리콘으로 바닥 틈새를 메웠는데 그 작업이 매끈하지 못했는 상 싶다. 아무래도 이층 지붕 누수 부분을 찾지 못해 흘러든 빗물이 세면장 바닥에 고여 아래로 스며든 듯하다. 급한 대로 수건을 펼쳐놓고 이층으로 올라가 살펴봤으나 찾을 수 없어 그냥 내려왔다. 그러는 사이 잠은 저만치 달아나고 물 듣는 횟수도 뜸해졌다.
산속에다 집을 짓고 사는데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근사하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지은 지 한 십 년은 되었나. 지인들한테 은근히 토목이며 건축과정을 늘어놓게 되는데 이때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 서울 업자가 와서 좋은 목재를 썼고 꼼꼼하게 짓느라 몇 달이 더 걸릴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얘기는 거듭될수록 흥미를 더했다. 목재만을 사용하여 여섯 칸의 방을 들였으니 고대광실로 과장하는 맛이라니. 이층에서 정자까지 데크가 깔린 독특한 구조의 섬백이 집은 압축성장의 산물답게 결핍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주인은 은닉하고 있었다. 보기에 그럴듯한 집이 천 년 만 년 체면도 세워주고 알량한 자존심도 흔들림없이 지켜주리라 여겼다. 이러한 자부심은 큰 차를 타고 큰 가구를 들여놓고 이름난 여행지를 오가며 느끼는 부류의 것들에 다름아니다.
풍요를 맘껏 누리게 되면 습관이 되는 법. 그러면서도 덜 소비하고 더 나누어야 한다는 담론에는 기꺼이 발을 들여놓고 불평등의 지형에 대해 관심을 표명해 왔다. 코로나19를 통해 겪은 불행을 인간탓으로 성토하는데 적극적이었다가 지금은 또 언제 그랬냐 싶게 망설임없이 소비를 하는 중이다. 참 같잖은 노릇이다. 마을 활동가랍시고 발전인지 성장인지 명확한 구분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자주 목표를 잃어버린다. 마을 소멸을 얘기하면서 환경이나 농약사용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마을 문화는 몇몇이 즐기는 사치스런 행위로 내몰리는데도 수수방관이다. 코로나나 기후위기 시대를 살면서도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탓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마을에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 앞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정말 해야 할 얘기들은 외면한 채 그저 살기 좋은 집,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고자 일해 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오히려 측은지정이 든다. 번듯하게 지어진 집이나 잘 가꾸어진 마을이 우리의 미래는 아닐 것이다. 일을 해 나가며 양보하고 협동하면서 이를 마을의 힘으로 비축할 때 마을은 마을답게, 그 마을 안의 집은 멋있게 다가올 게 아닌가. 크고 그럴싸함과 화려한 외형을 추구하던 풍요의 시대는 곳곳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우리는 그 생채기를 보듬을 줄 모른다. 지금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삶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날이 밝자 실리콘과 빗자루를 챙겨들고 이층 계단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