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남현숙(nhs1021@naver.com) |
| ⓒ 경북문화신문 |
|
산은 언제나 계절을 품고 시간을 타고 간다.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새싹이 돋아나는 봄과 푸른 잎이 무성한 여름, 알록달록 단풍 물든 가을 지나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얀 눈옷 입는 겨울이 온다. 오는 듯 가는 듯 속도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그만의 방법으로 계절을 품는다. 계절을 품은 채 소리 없이 가고 또 온다.
친구들과 그 겨울 금오산에 올랐다. 얼마 만에 정상에 오르는 것인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이다. 처음으로 오른 것은 아마 스무 살 겨울이었던 것 같다. 30년이 다 되어서야 두 번째로 오르는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고 올라야 했다. 운동이라고는 동네 공원 두어 바퀴 걷는 것이 전부였는데, 금오산 정상까지 오를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그것도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 산이라니.
하지만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하니 마음만은 스무 살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긴장 뒤에는 기분 좋은 설렘도 함께했다. 스무 살 때는 산을 날아가다시피 오른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속이지 못하나 보다. 폭포까지 오르기도 전에 숨은 턱에 차고 다리는 무거워져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다. 아니, 나이 때문이 아니라 평상시 운동량 부족인 듯하다. 주말마다 산에 오른다는 두 친구는 나보다 훨씬 잘 오르니 말이다.
친구들은 나보다 앞에 가서 내가 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산을 오르는 것이 목적이지 빨리 오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쉬엄쉬엄 올랐다. 겨울 산의 정취와 함께 덤으로 뺨을 에이는 매서운 추위! 제대로 된 겨울 맛을 느끼면서…….
산을 오르다 보니 좁은 산길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푹신푹신 눈을 밟는 것처럼 종아리까지 빠진다. 가을은 쉬이 떠나가기 아쉬워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남겨 두었나 보다. 낙엽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봄이 되면 새싹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지. 사라진 시간이 새로운 시간으로 오는 것처럼.
나이가 어릴 때는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아 빨리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른이 되면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그렇게 어른이 되고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시간이 가는 속도는 나이와 비례하는 것인지 나이가 들수록 시간도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백 살을 앞둔 지금 앞자리가 5로 바뀌면 얼마나 더 빠른 속도로 갈지 알 수 없다.
스무 살 때는 산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갔다. 빠른 시간 안에 정상에 도달해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쉼 없이 올랐다. 겨울 산의 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는지, 묵묵히 산을 받치고 있는 바위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지 않았다. 오롯이 정상을 향해, 그곳에 있을 무언가를 향해 산을 올랐다.
세월이 나이와 비례해 빨라지는 반면, 몸은 나이와 반비례해 느려지는 것 같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옆이나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이십 대와 달리 여기저기 둘러보는 여유가 생긴다. 물론 몸이 둔해져 그때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힘들어 그런 것도 있지만 때론 느리게 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빨리 가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느리게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잎눈을 보호하기 위해 마른 잎을 매달고 시린 바람을 이겨내는 나무가 보인다. 또 누군가의 소망을 품고 비바람을 견디고 버틴 돌탑들도 보인다.
그 모든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은 천천히 변해왔겠지.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듯이 내 모습도 변해왔다. 나이를 먹어 풋풋했던 이십 대는 사라졌지만, 마음은 지난날보다 성숙이 더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여유를 가지고 좀 느리게 가면 빨리 가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그 꽃」
힘들면 때로는 쉬어가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가고 싶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잘 따라오지 못하면 기다려 주기도 하면서……. 풀꽃 하나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으로 그렇게 천천히 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나만의 속도로.
금오산 정상에 올랐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느려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래! 바로 그거였다. /남현숙(nhs1021@naver.com)
※본 기고문은 지역의 수필 문학인으로 구성된 '금오산수필문학회' 회원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