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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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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상모사곡동 이야기에 덧붙여 상모동이 배출한 근대의 인물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널리 알려진 위암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선생의 글을 소개한다. 상모와 사곡동에 대해서 쓴 모로동기(慕魯洞記)이다.
韋庵文稿 卷四 內集 > 記 > 慕魯洞記
慕魯洞記
吉再의蹟 仙鳳寺 慕魯洞의 意義
慕魯洞, 在 善州治 南 四十里 金烏山 東, 地志 曰 金烏, 又曰 南嵩, 高麗 政亂, 吉注書(再) 편자 주 先生, 嘗 歸隱 于此, 由 是, 其山 特著, 自 洞口 沿溪 數里, 皆 石礫 畦畻, 而 往往 有 楊柳, 其地 瘠犖, 穀 不蕃, 村居 多 白桐 多 烏椑 山栗, 其人 皆 儉嗇 力 田作, 歲時 相 往來 宴樂,
村 西麓 平阜 可 數畝, 舊 有 李氏 雲深亭, 亭 今墟, 荒竹 中 惟 石砌 數重 而 已, 其下 有 雲溪瀑布, 崖 峭斷, 兩面 壁立, 狹 而深, 水從 峭斷處, 轉 石下 數三丈, 噴激 堆沫, 常如 飛雨, 盛夏 有 陰氣, 其下 盤石, 坐 可 三四人, 水 又從 盤石間, 磕磕 有聲,
其西 鷹峯, 又 其西 嵩嶺, 至 此 水 益淸 石 益白, 嶺之 南 佛幢谷, 多 浮屠迹, 其外 仙鳳寺, 不知 何時 毁盡, 惟 浮屠塔 · 義天碑 在, 其上 都事峴, 峴西 有 義天窟, 甚邃 而峻, 石窐 石牎, 宛然 尙在, 洞南 曰溫 水洞, 古 有 溫井 云,
昔, 惠莊王(世祖) 편자 주 受禪, 有 白山陰 效淵 者, 捐官 至 此, 徵辟 皆 不就, 因號 曰 慕魯洞, 蓋謂 慕魯陵 也, 今 山西 有 白氏塚, 余 寓 此 有年, 樂從 其 村人 遊, 得聞 土地 風俗 古事 頗詳, 遂書 以爲 遊魯洞 記。
장지연 선생의 문집인 위암문집 4권에 모로동기(慕魯洞記)가 실려 있다. 지금 상모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상모동과 사곡동의 유래를 밝힌 글로는 선생의 이 글이 유일하다.
위암 장지연은 1864년 상주의 동곽리에서 태어나서 1877년 봄에 구미로 왔다. 부산 항이 개항된 지 1년 뒤였다. 그해 겨울에 오태로 와서 1882년 겨울에 벽진이씨 준목(準穆)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상모동 용전(龍田)에 거주하다가 얼마 안 되어 운계(雲溪)로 옮겼다. 아마도 백운재(白雲齋) 뒤쪽으로 짐작된다. 상모동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1905년 11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사설로 필화(筆禍)를 당한 끝에 가족을 모두 이끌고 1906년 봄에 서울로 이주하였다.
모로동은 선산군의 남쪽 40리 금오산의 동쪽에 있다. 지지(地志)에서는 ’금오‘라고도 하고, ’남숭‘이라고도 부른다. 고려의 정치가 문란하여 주서 벼슬을 지낸 길재(吉再, 1353~1419) 선생께서 돌아와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그때부터 이곳이 특별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개울이 함께하여 몇 리를 이어지는데, 작은 돌과 자갈이 수북하니 개울가에 경계를 이루고 있다.( 참으로 절경이었소. 상모중학교, 상모초등학교에서 박대통령 생가에 이르는 이 작은 개울은 지금 복개되어 버렸지요) 마을에는 먹감나무와 밤나무가 많았고, 사람들은 모두 검소하고 아끼며 힘을 들여 밭농사를 지었지만, 명절 때마다 서로 왕래하며 잔치하듯 생활하였다.
마을의 서쪽 골짜기에 평평한 언덕이 수백 평 정도 되는데, 일찍이 이씨(벽진이씨, 필자 주) 들이 세운 운심정(雲深亭)이 있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다. 스산한 대나무가 수북한 가운데 돌계단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아래에는 운계폭포(雲溪瀑布)가 언덕 모양으로 가파르게 걸려서 양쪽으로 절벽으로 솟아 있다. 골짝은 매우 깊고,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물은 휘돌아가며 바위 아래로 쏟아지면서 격하게 물보라를 일으키다가 물거품만 어지럽게 흩어져간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있고, 그 아래에 반석이 있는데 서너 사람이 앉을만하며, 물은 반석을 따라 흘러가면서 돌 부딪히는 소리를 내곤 한다. 운계폭포 서쪽은 수리봉이고, 더 서쪽은 숭령(嵩嶺)이다. 이곳에서부터 물은 더욱 푸르고, 돌은 더욱 하얗다.
고개의 남쪽에 불당골이 있고, 그 바깥에 선봉사(仙鳳寺)가 있는데, 어느 때에 모두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고, 오직 부도탑과 의천비가 있다. 그 위는 도사현都事峴)이고, 그 서쪽에 의천굴(義天窟)이 있는데, 매우 깊고 험준하며 돌로 된 방과 돌로 된 창이 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완연하다. 마을의 남쪽을 온수동이라 하는데, 옛날에 따뜻한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지난 혜장왕(=세조) 때에 양위가 있었는데, 산음군수를 지낸 효연(效淵)이란 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는데,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하기를 모로동, 노산군(=단종)을 사모하는 모로동(慕魯洞)이라 하였고, 더러 “모로릉”이라고 하였다. 지금 산의 서쪽에 백씨총(=백씨들의 무덤)이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여러 해를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함께 어울려서 토지, 풍속, 고사를 많이 들었고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글을 쓰게 되었으니, 바로 “모로동기”이다. -모로동기 번역
모로동기를 보면 상모동을 일찍이 모로동(慕魯洞)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모로(慕魯)라는 지명은 무슨 뜻일까. 상모동과 사곡동 지역은 원래는 모립곡(謀立谷)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사곡(沙谷)과 한마을이었는데 비가 오면 낙동강이 범람하여 모래밭이 되니 이곳 방언으로 모립곡(謀立谷) 또는 실(室)이 모래와 결부되어 모래실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법정동으로 분리될 때 모래실은 한자 사곡(沙谷)으로 표기한 것이다.
반면 상모동은 윗쪽에 위치한 모립곡(실)이라 하여 상모(上謀)로 표기하게 되어 사곡동과 상모동(上謀洞)이던 것이다. 조선조 단종(端宗)께서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니 노산군(魯山君)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모노곡실(慕魯谷室)이라는 일설도 전한다.
위의 지명 유래를 종합하면 모립(謀立)이든 모로(慕魯)이든 모두 모래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모동도 마찬가지이다. 상모(上謀), 상모(上慕), 상모(上毛) 어떻게 표기하든 모래의 “모”를 한자로 쓴 것 뿐이다.
기록상 상모동과 사곡동에는 백효연(白效淵)이 단종 때에 왔다가 몇 대를 거주한 뒤에 약목으로 옮겼고, 그 뒤 17세기 초에 벽진이씨 구미시 입향조 이민선(李敏善, 1548~1626)의 사위 유태화(柳泰華)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다.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오래 된 성씨들은 모두 17세기 이후에 옮겨 오게 되었다.
1999년 초에 상모동과 사곡동이 인구수의 부족으로 통폐합에 이르게 되었다. 주민들은 양쪽으로 나누어져 치열하게 다투었다. 상모동 주민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상모동을 주장하였고, 사곡동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현재 행정동명으로 “상모사곡동”이라는 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윗 모래실과 아랫 모래실이 다투었으니 그것도 재미있다.
마을 이름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속설이 또 있다. 수원백씨에 이어 상모 사곡동에 거주하게 된 문화유씨들이 버드나무(柳)가 잘 자라라는 뜻으로 사곡(沙谷)이란 마을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모래실은 모래실이다. 사곡동은 개구쟁이 시절 필자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던 마을로서 언제 떠올려도 슬며시 웃음이 피어 오르는 추억의 저장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