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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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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기 마련이다. 사곡상모동 지명의 바탕이 되는 모립(謀立), 사곡(沙谷), 상모 역시 각각의 첫 기록이 있다. 먼저 “모립”의 시작을 찾아보자.
“모립”은 해평의 뛰어난 선비 인재(訒齋) 최현(崔晛, 1563~1640)이 선산과 구미시의 역사에 대해 1618년 편찬하신 일선지(一善志)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선지의 도입부에 해당되는 선산의 연혁(沿革)에 이어 강역(疆域)을 설명하는 대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동남으로는 인동현(仁同縣) 경계 봉현(烽峴)에 이르는데 45리이고, 인동까지는 60리이다. 남으로는 인동 약목현(若木縣) 경계 《모립현(毛立峴)》에 이르는데 50리이고 약목까지는 65리이다.
모립현(毛立峴)은 지금도 약간 낮아지고 도로포장이 되어 있긴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오태 마을에 있는 지금의 도로에서 약간 경부철도 쪽으로 돌아서면 20세기 초에 형성된 구불구불한 옛길인 신작로(新作路)가 모립현으로 곧장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선지에 다음과 같은 2개의 기록이 곧 바로 뒤따르는데, 형곡(荊谷)과 비산(緋山)과 함께 모립곡(謀立谷)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모립곡(謀立谷)
남쪽 40리에 있다. 금오산 동쪽이다.(原註: 이상은 南面이다.)
*사곡지(沙谷池)
모립곡(謀立谷) 동쪽에 있다. 못 물이 말랐다. (이상 일선지에서 인용)
사곡지는 1900년대 말에 이르러 완전히 물이 말라서 저수지의 기능을 모두 상실하였고, 지금은 완벽하게 성토(盛土)까지 되어, 현재 그곳에는 구미시 민방위 교육장과 새마을운동경상북도지부가 건립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선지의 기록으로 살피면 상모사곡동 지역은 조선 초기와 중기부터 모립(毛立), 모립(謀立), ’사곡(沙谷)‘이란 지명으로 당시의 선산군에서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덤으로 마을 이름 역시 사곡이 ’상모‘보다 훨씬 일찍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립도 모립(毛立)과 모립(謀立)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모사곡동의 지명은 ‘모래’와 관련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따로 없다.
사곡(沙谷)이란 지명은 “노상추일기”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되고 있다.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는 선산 출신 선비로서 조선(朝鮮) 후기의 무관(武官)으로 활동한 노상추(盧尙樞)가 남긴 일기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위탁보관.
《노상추일기》에서 노상추 본인은 자신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17세 때부터 쓴 일기는 남아있지 않으며, 18세 되던 계축년의 일기부터 노상추 자신이 사망하는 순조(純祖) 29년(1829년)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 한 해의 일기를 묶으며 그 해의 간지를 제목으로 적고, 간지가 돌아오면 앞에 '재'(再)라는 글자를 붙였다.(위키백과에서 인용),
*국역 노상추 일기 1-3 > 무자일기 1768년(영조 44) > 4월 큰달
4월 초9일(병인) 볕이 남.
아버지께서 내려오셨다. 류구보(柳久甫)가 인동(仁洞) 약목(若木)의 영장(營將) 신담(申琰) 집으로 향하였다. 아침에 새끼를 밴 청흑색靑黑色의 말이 서둘러 출산하여 수망아지를 낳았는데, 건강 상태가 평시와 같으니 가상하다. 류구보가 서면(西面)의 수(洙) 아저씨 말을 빌려 갔다. 신(申) 영장은 구보의 외외종조부(外外從祖父)다. (이하 생략)
4월 초10일(정묘) 볕이 나고 바람이 붊.
(전략) 남면(南面) 사곡(沙谷)의 류(柳)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왔다가 같이 돌아갔는데, 이들은 고남(古南) 정광보(鄭光甫) 척형의 사돈손님들이다. (하략)
*국역 노상추 일기 1-3 > 무자일기 1768년(영조 44) > 12월 큰달
12월 27일(신사) 볕이 남.
아버지께서 새집으로 가셨다. 오늘은 입춘일이다. 그래서 밤에 동리의 족인 3~4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하였다. 밤이 깊어진 뒤에 그대로 인서동(仁恕洞) 족숙의 초당에서 함께 잤다.
12월 28일(임오) 볕이 남.
식후에 사곡(沙谷)의 류룡익(柳龍翼)이 들렀다가 바로 돌아갔다. 나는 큰 형수씨가 목과 등과 가슴에 종기가 생기는 증세를 적어서 장산(長山)에 가서 의원 전광규(全光奎)를 만나보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춥고 떨리면서 두통이 있다가 열흘이 지나면 종기가 생기는데 천연두 수포가 부풀어 오른 모습과 비슷하다. 4개월이 지나면 종기가 아주 많아지고 인후통이 있고, 소변의 색은 황적색이며 대변은 묽으나 설사는 아니고 이질을 앓은 뒤에 건조해진 증세와 비슷하다. 또 평상시에 바람머리 증세가 있어서 어지럽다가 갑자기 증세가 멈춘다. (하략)
*국역 노상추 일기 1-3 > 병신일기 1776년(영조 52) > 4월 작은달
4월 17일(무오) 볕이 조금 나고 찌는 듯이 더웠음.
4월 18일(기미) 비가 종일 퍼붓듯이 내렸음.
4월 19일(경신) 맑음.
(전략) 타향에 계시던 도계봉(都啓鳳) 어른께서 사곡(沙谷)으로부터 어제 들어오셨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도(都) 어른을 만나 인사드렸다. 지금 《하구미(下龜尾) 사곡촌》에서 지내고 계신다. 강물이 넘친 정도가 12일에 내린 비보다는 조금 괜찮으나 걱정스러운 것은 보리[牟麥]이다.
*국역 노상추 일기 1-3 > 무술일기 1778년(정조 2) > 6월 큰달
6월 16일(갑진) 볕이 남.
볼 일이 있어서 인동(仁同)의 양촌(陽村)에 가니 처조부님의 병환은 여전하시고 다른 별일은 없었다. 양촌에 머물면서 오우옥(吳禹玉) 및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우후(虞候) 장성한(張成漢)의 아버지상을 문상하였다.
6월 17일(을사) 볕이 남.
지독한 폭염으로 나다니는 일이 매우 어렵다. 양촌(陽村)으로부터 인동(仁同) 읍내에 도착해 친구 장동준張東浚을 방문하였다. 오태진(梧台津)을 건너 죽곡촌(竹谷村)에 도착해 친구 장지렴(張志濂)를 방문하고 오후에 사곡(沙谷)으로 돌아왔다. 도계봉(都啓鳳) 어른 및 류용익(柳龍翼【운오(雲五)】씨를 방문하고 중평리(中坪里)의 선달 이용사(李龍思) 집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어서 머물러 묵었다. 죽곡(竹谷)에 간 것은 전죽(箭竹)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과연 얻어서 왔다.
*국역 노상추 일기 1-3 > 경자일기 1780년(정조 4) > 8월 작은달
8월 초9일(을묘) 흐리고 비가 뿌림.
(전략) 20리를 가서 참사(站舍)에서 말을 먹이고 30리를 가서 인동(仁同) 약목(若木)의 친구 신택주(申宅周) 집에 머물러 묵었다.
8월 초10일(병진) 흐리다가 아침에 볕이 남.
동내(洞內)의 친지를 방문하였다. 아침 뒤에 출발했는데, 도중에 비를 무릅쓰고 20리를 가서 사곡(沙谷)에 도착하여 친구 유용오(柳龍五) 집에 머물러 묵었다. 오늘 내린 비로 강물이 불었다.
8월 11일(정사) 맑음.
사곡(沙谷)에서 산소촌(山所村)에 도착하여 이(李)씨 별묘에 들어가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리를 가서 비산(緋山) 나루를 건너 양촌(陽村)에 들어갔다. 장인어른 註 002의 환후를 보니, 몸에 붓는 증세가 있었으며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할 때에 눈물을 흘리시므로 위로하는 말씀을 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월파참(月波站)에 도착하여 횃불을 밝혀 들고 집에 이르렀다. 집안에 아무 일도 없었으니 너무도 다행이다.
필자 註: 산소촌(山所村)은 지금의 광평동사무소 인근에 있는 벽진이씨의 구미시 입향조인 이민선(李敏善, 1548~1626)의 묘소와 추원재(追遠齋)가 있는 일대의 지명이다.
생애에 걸친 일기를 통하여 ”사곡“이란 지명이 18세기에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정확하게 기록한 노상추(盧尙樞, 1746~ 1829년)는 선산 출신의 선비로서 정조 때에 무과에 합격하여 조선(朝鮮) 후기에 무관으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안강(安康)이며, 자는 용겸, 호는 서산와(西山窩)이다. 정조(正祖) 4년(1780년) 무과에 급제하여 1793년 삭주부사(朔州府使)가 되었으며, 17세 되던 계축년(1762년)부터 순조 29년(1829년)에 84세로 사망하기까지의 68년의 일생을 적은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를 남겼다.(위키백과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