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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순(ins4444@naver.com)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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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초로에 이르게 한 세월 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니 홀연히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멍멍해진다. 무료한 시간을 감당할 만한 일을 찾아보지만, 익힌 취미도 없고 재주 또한 별로 없다. 대책 없이 시작된 인생 이모작에서 무능을 여실히 실감한다.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만, 아는 것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여행을 마음먹고 영어 회화 학원을 등록했다. 수강생은 취업 준비하는 젊은이들이다.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 배워보지만 생각처럼 혀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 강사와 수강생은 도움을 아끼지 않지만, 나로 인해 진도가 더디다. 미안해서 밥도 사면서 노력해 보지만 버겁다. 고맙다는 인사로 학원을 그만두었다.
책을 뒤적이며 하릴없이 집을 지킨다. 연배로 친하게 지내는 아랫집에서 노래 교실을 가잔다. 노래 부르고 배우면서 어울려 식사하고 차 마시며 소일하는 재미가 괜찮단다. 환영을 받으며 등록했다. 삼백 석이 더 됨직한 교실은 곱게 치장한 회원이 꽉 찼다. 쿵작쿵작 반주에 맞춰 손뼉 치고 노래를 부른다. 흥겨워 춤추는 사람도 있다. 나를 데려간 이웃은 노래 교실에서 인기가 많다. 덕분에 많은 이웃을 사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담기는 것이 없어 왠지 허전하다. 밑지는 느낌이다. 취향은 아닌데, 애오라지 다닌다. 그런 차에 이웃이 차 한잔하자며 내려오란다. 기꺼이 간다. 그 집 바깥양반은 전년도에 교직을 정년퇴직했다. 대화가 상통한다. 시간을 보내려고 봉사활동도 하고, 마누라가 답답하다며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나가라기에 등 밀려 토요일은 도서관에 주역 공부를 나간 지 두어 달 되었단다. 공부라는 말이 솔깃하게 들린다.
따라서 주역을 공부하러 갔다. 희수喜壽를 지났다는 선생님은 다소 왜소한 체구에 안경 없이 칠판에 한문 일색에 부호 같은 것을 그려 놓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압도적 열강을 하시지만,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이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다. 영어 회화는 비할 바가 아니다.
자세히 들어본다. “초구는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 건괘의 맨 처음 양(초구)을 용으로 본다면 잠겨 있는 용이다. 아직 활동할 때가 아니며 또한 나서서 활동할 만한 실력도 부족한 상태이니 쓰지 말라는 것이다. 初九 潛龍 勿用……, 상구는 높은 용이니 뉘우침이 있을 수 있다. 오직 성인이라야 진퇴 존망 때를 알아 지나침이 없으니, 뉘우침에 이르지 않는다. 上九 亢龍 有悔” 잘은 이해되지 않으나, 어진 성품으로 수양하는 과정을 말씀하는 듯하다. 밑지지는 않는 것 같다.
‘못된 성질머리는 마음 한구석 너그럽게 쓰지 않으면서 아집에 빠져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 붉어진다. ‘이 공부로 넉넉한 마음 밭 일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 볼까. 이 선생님이 나를 주인 만나게 해주었구나.’ 싶다.
이 선생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 흥미 없다며 한 달을 같이하지 않았다. 나는 심전을 가꾼다는 생각으로 빠지지 않고 간다. 처음 수강자는 2주 만에 십중팔구는 나오지 않는다는데, 의아하게 보는 듯하다. 부족한 식견으로 반년을 보냈다. 나무가 높으니 아직 보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서 사람이 보인다.
선생님은 주역의 대가 아산 선생 학맥을 전수傳受한 일강 김진규 선생님이셨다. 머릿속에 모든 경전이 고스란히 저장된 것 같다. 막힘이 없으시다. 일간신문 한 부분도 빠짐없이 보시고 강의에 앞서 말씀해 주시기도 한다. 해박한 지식이 존경스럽고 부럽기만 하다.
선생님은 멍청한 내가 가상해 보였는지 그제야 인사를 시키시고 공부 오시는 분을 소개해 준다. 대다수 한학에 조예 깊은 명망 있는 분이다. 선생님은 “이해가 되나요?” 묻는다. “아니요” 했다. 웃으시며 직접 집필하신 주역 상, 중, 하와 대학, 중용 책에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 쓰시고 낙관해 주며 말씀하신다. 사서삼경에서 최고 단계가 주역이라 한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듣고 듣다 보면 이해되니 게을리 말고 배우라고 격려한다. 천자문 한 번 보지 않고 천지 분간 없이 주역을 공부하러 오다니 웃을 일이다.
공부 나오는 분들이 이곳저곳 공부하는 곳을 알려준다. 수업을 찾아다녔다. 선산 향교는 소학 끝부분을, 인동 향교는 천자문을, 도서관은 명심보감을 수업하고 있었다. 곳곳은 몇 년을 이어 공부하고 있으니 중간에 들어간 나는……. 수업은 송독으로 시작한다. 현토 하나 알지 못하니, 처음부터 막힌다. 당연히 재미없다. 두 시간을 졸다 깨다 보낸다. 이 짓은 아닌데, 공부를 해보자!
참고 자료가 될 만한 책과 한문 공책 백 권을 샀다. 늦깎이 공부인 만큼 다른 사람이 한 번 하면 나는 열 번, 백 번이라도 해보리라 각오한다. 그날로 두 시간 공부할 것을 열 시간 이상 사전을 찾아 한 문장 한 문장 공책에 옮겨 싣는다. 무식한 용기로 시작한 주역에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읽고 고문진보를 새겨본다. 공책 백 권을 다 썼다. 다시 백 권을 주문한다.
까마득하던 문장들이 조금씩 보이기도 하지만, 한 글자 뜻이 심지어 이삼십 개가 되는가 하면 어떤 자字는 문장에 따라 정반대로 새겨야 하는 것도 있어 문장을 이해하기에 어려움도 많다. 선생님께서 공부의 정석은 많이 보고 익히는 것이라 하셨다.
아직 공부가 한없이 부족하다. 투미하여 새겨보아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 초조하고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초심을 잃지 말자. 다른 사람 한 번 하면 나는 열 번……. 다시 책을 본다. 보고 또 보고 듣고 듣다 보면 이해된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며칠 전 고문진보 시편을 시작했다. 자료를 찾으며 어렵게 새겨보는 재미가 괜찮다. 책을 덮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도 하지만, 욕심부리지 말자. 그래도 보는 시간이 즐겁지 아니한가.
늘그막에 시작한 공부는 늘 마음 설레게 한다. 읽을 것이 많아서 좋다. 통감, 사마천 사기, 시경, 서경, 노자, 장자도 읽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늙음을 익혀 가고 싶다. /이남순(ins4444@naver.com)
※본 기고문은 지역의 수필 문학인으로 구성된 '금오산수필문학회' 회원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