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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동식 수필가(전 구미형남중 교장)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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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빈 작가의 청소년 소설 『고요한 우연』을 읽다가 중간쯤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여고생 단짝 ‘수현’과 ‘지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공원 산책길에서 본 고양이 이야기를 하던 끝에, 수현이가 지아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 삶의 이유는 뭐야?” 그러자 지아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사는 거지."라고.
수현이 진지하게 말하라고 하니 지아는 ‘그렇다.’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 지아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게 살다 보면, 자기만의 소소한 행복도 찾고 즐거움도 찾고 뭐 그런 거지. 아니야?"
이에 수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부쩍 기분이 가라앉은 요즘이었는데, 어제 산책길에서 길고양이 ‘아폴로’를 만난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렇다. 마침 코로나 감염으로 격리 중에 이 소설을 읽었기에 수현이가 길고양이를 만난 기쁨에 공감이 되었다. 일주일간을 무작정 내 방에서 버터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5월 초에 하얗게 피는 금오산 도수령 아래의 노린재나무꽃을 촬영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야말로 지아의 말대로 도리 없이 ‘그냥 사는 거’였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그냥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생각났다. 그 칼럼 필자와 어느 현직 교사의 대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필자가 요즘 아이들이 예컨대 무단 외출의 이유를 물으면 “그냥요.”라고 대답하여 화를 돋우는 경우가 잦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그 현직 교사는 필자를 측은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선생님은 그냥 살아보신 적이 없습니까?”하고 반문했다. 그 순간 그 필자는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현직 교사 자신도 아이들의 그런 대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 아니 나아가 인간의 삶이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독 학생들에게만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할 순 없다는 것이 그 현직 교사의 생각이었다. 그 까닭을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냥 살잖아요. 무의미를 견디면서요.”
그러고 보면 피천득의 ‘은전 한 잎’에 등장하는 늙은 거지의 삶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이 수필의 주제문이자 끝 문장인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에는 ‘그냥’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작품의 주제를 ‘맹목적인 소유욕과 집착에 대한 연민의 정’이란 관점으로 해석할 때만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의문과 아쉬움이 생긴다. 그것은 긴 인생에서 ‘그냥’ 사는 적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그런 경우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점이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살다 보면 그냥 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더러 있겠지만, 삶의 주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꾸려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삶의 많은 부분을 의미 있게 영위해 갈 수 있을까? 달리 말해서 ‘그냥’ 사는 삶의 무료함이나 무의미함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만일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라면 그것은 경이와 감동을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이와 감동의 대상은 다양하겠지만, 특히 소중한 것은 자연을 느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자연自然은 뜻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그러니까 또 다른 의미에서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닌가. 환경 운동가 레이첼 카슨 여사는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분은 “부모라는 이름의 외로운 별들이여!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의 의미, 신비, 아름다움에 다만 놀라워하라.”고 멋진 권유를 보내주었다.
이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쯤 산책했으면 한다. 삶에 감동의 순간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걷기는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것을 탐구하는 행위’라고 하거니와, 서두르지 않고 산책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감동과 경이이다. 앞서 소설에서 수현이가 길고양이 ‘아폴로’를 만난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도 산책의 산물이 아닌가.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는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나 바다, 호수, 강 근처에 난 길 등이 좋다. 예컨대 통영의 소매물도 망태봉에서 등대섬을 바라보는 정경은 너무도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 식물원이나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모든 볼거리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걷는 것이다.
세계적인 해양학자 스웨덴의 오토 페트로손은 인생을 마무리할 시기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나를 북돋워 줄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다음에 과연 어떤 놀라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질까 하는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란다.”라고,
간간이 심호흡하며,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한 태도로 관찰하며 걸어보자. 무엇인가를 잘 관찰한다는 것, 그것은 삶에 호기심을 끌어들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멋진 방법이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자연을 가까이하는 마음이 익어가면서, 이백의 ‘산중문답’처럼 왜 푸른 산에 사느냐는 물음에 굳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아도, 절로 마음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의 끝 구절, “왜 사냐건 웃지요.” 의 경지를 지향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두 편의 시詩에는 차원이 다른 ‘그냥’이 한결 우아하게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바로 레이첼 카슨 여사가 권장하는 자연을 느끼는 삶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살다 보면 일상의 기본적인 무료함, 혹은 무의미를 견디는 힘으로서 단순히 ‘그냥’ 사는 삶도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함에도 그것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 경이와 감동이 함께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러움으로서의 ‘그냥’의 상태에 다가서기를 바라고 싶다. 그것은 곧 행복을 발견하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