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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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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금오산 입구의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는 창랑 장택상 컬렉션이 시민들에게 선을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품 특별전으로 열리게 되었다. 전시회는 9월 12일부터 시작되어 10월 30일 마감된다고 하니 창랑 컬렉션을 감상하려면 발걸음부터 서둘러야 하겠다. 이번에 전시되는 우리의 옛 문화유산을 수집한 창랑 장택상(1893~1969)은 구미시 오태동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큰 인물이다.
"풍우 속에도 꺽인 적 없고 해학을 즐기되 본성을 잃지 않았던 창랑 장택상 선생의 본관은 옥산(玉山), 아버지는 자헌대부궁내부특진관 승원(承遠)공이고, 어머니는 풍양조씨이며 1893년 10월 22일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일본에 가서는 와세다 대학, 영국에 가서는 에든버러 대학에 유학했었고,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서자 혹은 초대 외무장관으로 혹은 2대 민의원 부의장으로, 다시 국무총리로, 3-4-5대 민의원으로, 안에서는 반공정책 수행의 선봉이었고, 밖에 나가서는 한국 대표로 외교에 힘 쓰다가 1969년 8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은 77세요 국민장으로 모시어 모두들 충심으로 명복을 빌었다." (이은상이 지은 창랑 장택상 묘비문에서 인용)
묘비문의 옥산(玉山)은 인동으로 이해하면 된다. 옥산은 구미시 인의동 576번지 지금의 옥산사(玉山祠)가 있는 곳을 가르키는 지명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낮으막한 구릉에 가깝다. 그러나 옥산사에 들러서 한번이라도 고개를 돌려 금오산을 바라보면 옥산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대번에 깨닫게 된다. 옥산의 위치는 새삼 옷길을 여미게 할만큼 신비를 넘어 신령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기묘한 기운이 서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미에서 금오산을 제대로 느낄만한 명소는 여럿 있다. 그런데 옥산에서 바라보는 금오산만큼 빼어난 곳은 없을만큼 옥산은 단연 으뜸이다. 옥산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은 실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고 또 신비로우니 절로 감탄만 나올 뿐이다. 인동장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설명에 따르면, 금오산이 양이라면 옥산은 음에 해당된다고 한다.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이 가을에 옥산 가문의 창랑 장택상 컬렉션이 금오산에서 열리고 있으니 이 또한 뜻깊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의 전시회는 구미문화원의 기획에 따라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특별한 협조로 성사되었다. 창랑은 남다른 안목과 민족사랑으로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수많은 고미술품과 문화유산을 모은 수집가에다 수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켈렉션이 구미시민들에게 직접 전시된 것은 이번이 최초이지만 그의 고미술품 수집에 대해서는 지역사회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그의 수집품은 실로 방대하였지만 한국전쟁과 정치적 풍파로 인하여 일부는 파손되고, 일부는 다른 수집가들과 곳곳으로 흩어지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창랑은 그의 별호만큼이나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거쳤으니 이런 곡절이야 미루어 짐작할만한 일이기도 하다. 창랑이 작고한 뒤에 선생의 소장품 380점은 그의 평소의 유지(遺志)를 새긴 부인 김연식 여사의 뜻으로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영남대학교 박물관은 2018년 유족과 협의하여 "창랑 장택상 선생 기증유물도록"을 발간해 예술품 수집가로서의 창랑을 재조명하고 이번 전시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창랑의 수집가로서의 자질은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에서 익힌 가풍과 그가 태어나서 자란 구미시 오태마을의 유서깊은 역사와 수려한 자연경관의 영향으로 몸에 배이듯 차곡차곡 형성되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따로 없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에다 고관을 지냈으니 매일같이 찾아드는 시인, 묵객과 선비들로 오태동 그의 생가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더하여 오태마을은 성리학을 유일무이한 학문으로 치부하던 조선에서 손꼽히는 성리학의 성지(聖地)가운데 하나였다. 창랑이 태어났을 때 오산서원은 비록 훼철되었지만 우뚝한 지주중류비가 지척에 있었고, 조선 성리학을 개척한 야은 길재선생과 10대조이신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묘소를 아침 저녁으로 마주 대하면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오태동과 임은동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의 훈도를 받으면서 창랑은 소년시절부터 우리 민족이 이룬 문화유산의 멋과 아름다움에 험뻑 빠져 들었으며, 그 자신이 한 경지를 이룬 서예가 이기도 하였다.
이번의 창랑 컬렉션 전시에는 도자기, 인장, 불상, 벼루, 목공예품, 부채, 편액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모두 40점에 이르고 있다. 백자청화사각병, 백자격자십자문사각연적, 청화백자운용문 접시, 청화백자운학문 사각접시 등 4개의 도자기만 보더라도 창랑 컬렉션의 높은 품격을 대번에 알아차리기에 충분하다. 인장부터 다른 수집품에서도 창랑의 남다른 안목은 한껏 빛을 발하고 있다.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역시 편액이다. 단연 독보적인 작품으로는 우선 추사 김정희 선생의 편액 둘이 있는데, 하나는 완당횡액 단연 "죽로시옥" 편액과 완당의 행서 현판 하나가 더 있다.
완당은 김정희선생의 호이다. 임시정부 주석이신 백범 김구 선생께서 쓰신 "창랑별업(=별장)" 편액도 눈길을 끈다. 영남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미수 허목(1595~1682) 선생의 허미수 서액, 한훤당 김굉필의 편액과 옹방강 편액도 들어 있다. 옹방강은 추사가 존경해 마지않은 청나라의 서예가이다.
창랑의 수준높은 고미술품 수집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세간의 평판이 높았다. 그가 수집한 도자기 가운데는 보물로 지정된 명품이 있을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의 잡지 "조광"에 실린 창랑의 육성에서 그가 왜 고미술품과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속깊은 이유를 뚜렷하게 알게 된다.
(전략) 기자는 장택상 씨에게 다짜고짜로 "도자기를 수집하신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까?"하였더니 "한 이십년 되었습니다."
"수집하신 동기는요?"
"별 것이 있소. 그저 조선 물건에 취미가 있어 모으기 시작하였지요."
이어서 "조선 사람같이 이 방면에 무관심한 사람이 어디 있겠소. 조선 사람은 그 훌륭한 도자기를 본정(지금의 충무로)으로 들고 가서 오전 십전에 파는구려. 참 기가 막히지요."
"아, 그렇습니까" 하고 기자도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택상 씨는 기자를 바라보며 "여보세요. 글쎄 몇□만원이나 되는 세계적 국보를 오전 십전에 팔아 먹었구려. 외국박물관을 다녀보면 좋다는 도자기는 모두 조선 것이구려. 이것이 모두 조선 사람들이 오전 십전에 팔아먹은 것들이오."(이하 생략)
무심한듯 말하고 있지만 창랑의 민족의식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확인되는 대목이다.
창랑 컬렉션과 크게 구별되는 것으로 오쿠라 컬렉션이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문화유산 약탈자로 악명 높은 일본인 오쿠라 다케노스께(小倉武之助)가 있었다.오쿠라는 1911년 자본금 10만원으로 대구전기회사의 설립 허가를 받아 개업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3대 도시로 평가되었는데, 그는 대구를 발판으로 전기를 공급하여 엄청난 부를 축척하였다. 오쿠라는 이후 광주와 함흥에까지 사업을 확장하여 회사 이름을 대흥전기회사로 바꾸었다. 오쿠라는 전기공급으로 조선에서 그만의 왕국을 만들어갔으며 포항, 통영, 울산, 경주, 제주, 안동에도 자회사를 두기에 이르렀다. 1930년 구미에 처음 전기를 공급한 회사도 대흥전기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자금으로 오쿠라는 가난에 몰려 오전, 십전에 파는 조선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마구잡이로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미친듯이 우리의 문화재를 쓸어갔는데 때로는 도가 지나쳐서 도굴이나 강탈도 서슴치 않았다. 오쿠라는 일본이 패전하자 그의 수집품을 모조리 밀선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때문에 1965년 있었던 한일회담에서 오쿠라 컬렉션의 반환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오쿠라가 사망하자 그의 유족들은 그가 소장했던 조선의 문화유산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오쿠라 컬렉션에 비교해 보더라도 창랑의 컬렉션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창랑컬렉션의 개막식은 9월 12일 오후 2시 컬렉션이 열리는 금오산의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의 개막식에는 근래에 드물게 지역의 유지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그야말로 드문 성황을 이루었다. 개막식의 마지막 식순으로 테이프가 잘리고 영남대 박물관장의 해설을 들으면서 전시품들의 돌아보는 과정에서부터 개막식을 마치고 흩어지는 참석자들의 귀로에서도 두런두런 창랑에 대한 뒷말들이 무성하였다.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로고. 이제서야 창랑 장택상의 생애가 구미에서 처음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다니." "창랑이 언제적 사람인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천하의 창랑이었는데, 세월무상에 인생무상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