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김종길 시니어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
창랑 장택상이 태어난 오태 마을의 풍경은 보면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묘하게도 신비한 여운이 있다. 금오산 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오태 마을에는 야은 길재(吉再, 1353~1419)의 묘소가 있다. 이런 이유로 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뜻 있는 선비들이 찾는 성리학의 대표적인 성지(聖地)가 되었다. 구미시의 서쪽에 불끈 솟은 금오산은 산세가 형곡동 뒷산의 전망대에서 완만하게 뻗어 문필봉・열녀봉・효자봉을 이루고 있다. 효자봉에서 다시 약간 서남쪽으로 기울면서 임은동을 지나 오태 마을 끝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오태 나루에서 낙동강은 칠곡, 성주, 고령을 거쳐 김해와 부산 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1585년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당시 인동현감으로 재직 중인 형님이신 유운용(柳雲龍, 1539∼1601)의 초청으로 오산서원(吳山書院)의 준공식에 참석하였다. 오산서원은 유운룡의 주선으로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비롯한 지역 유림이 힘을 합쳐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가 있는 오태 마을의 나월봉(蘿月峰) 산기슭 아래 3년의 공사 끝에 건립되었으며, 유성룡은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의 음기(陰記)를 저술하였다. 뿐만아니라 오태 마을에 들른 서애 선생은 ”인동서헌(仁同西軒) 10절(十絶)“이란 제목으로 인동의 서쪽에서 바라본 금오산, 낙동강, 야은 선생의 묘소, 천생산성 등 주변 경치에 대한 10편의 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금오산”이란 제목의 시가 구미시에서 발행한 《구미시대》 2025년도 2월 호에 실려 있다. 선생의 시를 옮긴 서예가 연민호의 글씨도 깔끔하다.
높은 산 봉우리 구름 위로 솟아 있고 / 高峯 出雲際
계수나무는 가을이라 더욱 푸르네 / 桂樹 秋 深碧
산 아래 야은 선생께서 계시니 / 下 有 高人 居
맑은 바람 끊임없이 불어오네 / 淸風 吹 不歇。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영의정으로 정계를 물러나자 영남은 조선의 중앙 정계에서 철저하게 밀려나게 되어 다시는 누구도 영의정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런 정치 환경은 조선의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바뀐 1952년 5월 6일 창랑 장택상이 비로소 제3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유성룡 사후 300년이 훌쩍 지난 뒤의 일이었다. 창랑은 국무총리로 임명되자 안동의 서애 선생의 묘소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애 유성룡과 장택상은 모두 국난(國難)의 시대를 살았지만 300년이 넘는 시간의 간격으로 두 사람이 마주한 국난의 성격은 현저하게 달랐다. 16세기에 태어난 유성룡은 이웃 나라인 일본과 조선의 북방에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여진족의 성장으로 일생 국가적 위기에 시달렸지만 서양으로부터의 위협은 전혀 없었다.
16세기부터 300년 사이에 동아시아의 세 나라 조선과 중국, 일본은 16세기 이래 정체(停滯)에 정체를 거듭한 반면, 대항해 시대부터 동양 진출을 시작한 서양의 강대국들은 산업혁명을 공업화가 눈부신 성과를 이루게 되자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메리카의 서인도제도와 남북아메리카.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진출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특히 유럽 북방의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의 확보하기 위한 아시아 진출의 오랜 열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면서 1888년부터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에 착수하여 1904년에 이르자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개통하였다. 명실공히 세계 최장거리 철도 노선인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에 따른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결국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창랑이 태어난 1893년을 전후하여 중국인들의 자랑이었던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은 서양의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러시아의 진출로 국토의 전역이 점령되어 서양 각국으로부터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조롱받으면서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보다 30년 일찍 개항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시기를 거쳐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은 산업혁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룬 영국이었고,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미국이 무서운 기세로 영국을 추격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러 사실상 영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의 이웃 나라인 일본은 미국의 포함외교로 개항하여 일찍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1902년 1월 30일 영국과 일본은 영일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승리로 중국을 넘어선 일본은 영일동맹을 계기로 군사력에서도 신흥강국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을 삼키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