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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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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것은 삶이 흘러간다는 말이다. 계절들은 저마다 다른 나의 삶을 안고 있었다. 지난봄은 나에게 아쉬움을 남겨놓고 흘러갔다. 그런가 하면 소망과 기쁨도 남겨놓았다.
무엇이 잘못된 탓인지 해를 바꾸어 가며 요통을 계속 앓고 있다. 지난해 벽두부터 일기 시작한 통증이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같은 계절이 돌아와도 잦아들지 않는다. 큰 병원 작은 병원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유용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봄이 왔다. 내 처지와는 상관없이 봄은 제 할 노릇을 잘해나갔다. 마른 나무에 움을 틔우기 시작하고, 검은 땅이 조금씩 푸른 빛을 띠어갔다. 이맘때쯤이면 늘 오르던 집 뒷산에는 생강나무며 올괴불나무도 눈을 뜨겠지. 곧 노란 꽃술이며, 연분홍 꽃 초롱을 달겠지.
마음은 산으로 먼저 달려갔지만, 몸이 쉽사리 따라나서지를 못했다. 참을성이 바닥난 어느 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받치며 용기 내어 나섰다. 산기슭을 기다시피 힘주어 올랐다. 그리던 대로였다. 생강나무 노란 꽃이며 올괴불나무 조그만 꽃이 함초롬 피어 있었다. 어린 진달래꽃도 두어 송이 눈에 든다.
힘든 몸에 한결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이리 너희들 보러 왔지 않으냐. 이 꽃들을 한참 사랑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저 가풀막 위에 무리 지어 핀 진달래가 가슴들을 활짝 벌리고 있다. 언제 저리 피었나. 뛰어올라 끌어안기도 하고, 묻히고도 싶었다.
발은 앞으로 나가는데, 용을 써도 몸이 나가주지를 않는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다가 손을 흔들었다. 몸 잘 다스려 다시 오마. 돌아 돌아보며 기슭을 내려왔다. 다시 보자던 그 약속 봄이 다 가도록 지키지 못했다. 봄은 아쉬움을 남기고 속절없이 가버렸다.
내 봄이 아쉬움만을 남긴 건 아니었다. 희망과 즐거움을 안긴 계절이기도 했다. 하늘도 강물도 조금씩 풀려가던 초봄 어느 날, 길을 스치다가 어느 빌딩에 걸린 ‘통증 치료’라는 현수막을 보고 그곳을 찾아 들었다. 젊은 의사가 진료하는 한의원이었다.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다.
내가 말하는 증상을 꼼꼼히 기록하더니 “한번 해봅시다.”라고 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병원으로 향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침술과 탕약을 위주로 하는 치료가 예상보다는 쉽사리 효험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내 발길은 즐거이 그 병원을 향하고 있다. 먼저 맥을 짚어 보고, 몸 곳곳에 혈을 찾아내어 주무르면서 정성스레 침을 놓는 손길과 모습이 여간 따뜻하지 않다. 의무감으로 건네지는 손길이 아니라, 병약자에 대한 진심 어린 손길인 것 같다. 치료를 받고 나오는 걸음이 한결 가뿐한 것 같았다.
설령 내 병이 쉽게 낫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 의사의 정성과 의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 병이 워낙 고질이라 쉽게 낫지 않을 뿐이라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 손길이 그저 고맙고, 병원 가는 길이 즐겁게 느껴지게 했다.
바로 이 <살며 생각하며>의 앞선 글에서 「즐거운 병원 길」이라는 제목으로 이 의사의 친절 이야기를 썼다. ‘즐거운’과 ‘병원 길’의 결합이 모순 형용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 상념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로 여겨진다.
그 의사의 정성에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현으로 글이 제재된 사이트 주소도 알려 주고, 출력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다음에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글을 읽고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많은 감동도 받았다며, 내 정체(?)가 궁금해 여러 곳을 검색해 보았다고 했다.
내가 낸 수필집의 제목도 말하면서 고명한 분을 진료하게 되어 영광이라 했다. 사인이라도 받고 싶다고 하며 더욱 정성스러운 손길을 베풀었다. 별로 그러하지도 못한 처지라 민망스럽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 담아 서명한 수필집을 한 권 드리겠다 하니 거듭 감사하다고 했다.
다음 치료받으러 가면서 수필집 한 권을 선물했다. 감사해하는 표정에 묻어나는 진심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디 불편한 곳은 더 없느냐며 곳곳을 살펴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치료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며 귀한 약재들을 곁들여 챙겨주었다. 그 친절들은 몸에 밴 천성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봄이 흘러갔다. 계절은 바뀌어 가도 나의 병원 길은 이어지고 있다. 그 봄은 나에게 보고 싶은 꽃도 마음대로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안겨 주기도 했다.
요통은 아직 나를 떠나지 않고 있지만, 그렇게 따뜻하고 진심 어린 손길이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상쾌한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바람과 기다림을 보듬으며 오늘도 즐거운 병원 길을 나선다. 푸른 하늘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싱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