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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동식(청소년문학교육평론가)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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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성징과 함께 나타나는 사춘기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정서와 감정이 불안해지며 자아의식도 높아진다. 특히 소녀들에게는 남과 다른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미리암 프레슬러의 청소년 소설 『씁쓸한 초콜릿』과 쯔바이백의 『나틸리의 꿈나무』를 통하여 외모 열등감 극복의 참의미를 탐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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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암 프레슬러의 『씁쓸한 초콜릿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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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열등감 극복의 참의미(1)-있는 그대로의 자신 수용 -미리암 프레슬러의 『씁쓸한 초콜릿』초콜릿은 달콤함의 대명사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초콜릿이 씁쓸하다. 『씁쓸한 초콜릿』의 주인공 '에바'에겐 그렇다. 그녀는 초콜릿을 입안 가득 품고는 슬픔을 눈물로 짜내는 열여섯 살 소녀다.
에비에겐 뚱뚱함이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곧,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에바’가 겪는 가장 커다란 갈등은 외모로 인한 열등감이다. 에바는 자신이 뚱뚱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두렵다. 혹 상처받을까 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뚱뚱한 자신의 몸에 대한 열등감은 그녀의 행동을 위축시킨다. 그래서 늘 숨고 싶어진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칠판 앞으로 나가는 대신 고개를 숙여버린다. 체육 시간에 팀을 짤 때가 되면 제대로 묶여 있는 신발 끈을 괜히 풀었다가 다시 매는 수고도 한다.
그런 에바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가 건네주는 초콜릿은 씁쓸하기만 하다. 달콤한 행복감이 아닌 씁쓸한 불쾌감. 더 뚱뚱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뚱뚱한 자신에 대한 원망은 초콜릿의 씁쓸한 맛 속에 한없이 녹아든다. 에바에게 삶은 씁쓸한 초콜릿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찾아온다. 분수대에서 우연히 만난 '미헬'이란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또 '프란치스카'란 반 친구를 만나면서 그녀의 뚱뚱함이 삶에 큰 의미가 없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들은 에바가 뚱뚱하다는 사실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미헬과 프란치스카와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에바는 서서히 내면에 감춰져 있던 자신감을 얻는다. 그 전까지 있는 둥 마는 둥 하던 에바는 반 친구들과도 소통하게 되고 급기야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에바의 신체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여전히 뚱뚱한 소녀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에바는 이제 자신의 모습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짜 문제가 객관적인 외모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기 외모에 대한 비합리적 사고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동안 짊어졌던 뚱뚱함에 대한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하고 수용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외모 열등감 극복의 참의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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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쯔바이백의 『나틸리의 꿈나무』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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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열등감 극복의 참의미(2)-용모보다 소중한 따스한 마음씨
-쯔바이백의 『나틸리의 꿈나무』 용모에 대한 관심은 여학생들의 제1특성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소설로 쯔바이백의 『나틸리의 꿈나무』가 있다. 미국 뉴욕의 중류 가정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여주인공 ‘나틸리’ 는 얼굴이 남보다 못생긴 데서 느끼는 특유의 열등감으로 고민한다.
‘나틸리’는 열일곱 살이 되는 해의 자기 생일 선물로 거울을 사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선물로 받은 거울을 보고 못생긴 자기 얼굴에 실망한다. 어머니는 ‘어릴 때 예쁜 아이는 커서 미워진다.’라며 자기 딸을 위로한다. 그래서 어린 나틸리는 용기를 얻어 거울 밑에 ‘너는 미인이다.’라는 말을 써놓고 예뻐질 날을 기다린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반이 된 ‘나틸리’는 댄스 파티에 참가했다가 자기의 미운 얼굴을 보고 남자아이들이 상대를 해주지 않는 데 비관한다. 또한 커서도 예뻐지지 않는 자신을 자각하고는 모든 일에 반발적으로 행동한다. 여대생이 된 뒤부터는 이런 반발과 반동이 남자처럼 정치적 활동으로 쏠려 전쟁을 반대하는 행동 모임의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반전주의(反戰主義) 남학생들과 데모에 참가하는 따위의 행동으로 자기 내부의 감정을 발산한다.
마침내 나틸리는 집을 뛰쳐나가 사회와 부딪혀 자기를 발견하고 자립해 보려고 한다. 나이트클럽에 취직한 그녀는 그리니치빌리지에 방을 얻어 혼자 산다. 여기서 아래층에 사는, 실제로는 건축가이지만 잠시 화가 수련을 하고 있는 해리스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해리스는 나틸리의 얼굴이 아닌 순진하고 따스한 마음에 감동하여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나틸리는 자신도 이제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해리스는 두 아들과 아내를 가진 기혼 남자였다. 나틸리의 실망과 비애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틸리의 실망과 슬픔을 달래면서 아내와 이혼하고 진정 사랑하는 나틸리와의 결합을 맹세하게 된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심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하지 않는 염원이다. 그러나 작가 쯔바이백은 용모의 아름다움보다 마음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고 있다. 불전(佛典)에 이르기를 ‘곳간의 재물보다도 몸의 재보(財寶)가 값지고 몸의 재보보다는 마음의 재보가 으뜸이니라.’고 하였다. 조르주 상드의 소설 『사랑의 요정』의 여주인공 ‘파데트’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몸의 재보, 곧 용모보다는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따스한 마음씨인 것이다. 이것 또한 외모 열등감 극복의 참의미라 하겠다.
<참고 서적>
우동식, 『청소년의 아픈 자리, 소설로 어루만지다』 P. 37~39(정인출판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