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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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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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5년째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진흥회’라는 단체에서 개최하는 ‘지역 정체성 찾기 토론회’ 패널로 초청받았다. 몇 사람이 주제를 발표하고, 그에 관해 토론을 벌인다 했다.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뜻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평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해 관심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발전을 위한 운동을 해오고 있었다. 그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의식이 정체停滯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과 함께 그 인식과 의식을 고양해 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예컨대, 어떤 산업이 시대의 변천을 따른 흥망성쇠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웃 지역에서는 그 역사의 흔적을 박물관 등을 통해 고스란히 간직하여 새 문화를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해 이 지역에서는 현재는 쓸모없는 것이라며 그 흔적들을 깡그리 지워버렸다고 했다. 그런 지역성으로 인해 지역의 문화와 역사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나가보자면서, 선진 지역 문화 유적을 답사하고, 관계 자료 인사 초청 강연회도 열고. 향토애와 역사의식 고양을 위해 곳곳의 옛 지명을 찾아 지도로 만들어 보급하고, 미풍양속 보전을 위해 택호 패를 만들어 집집이 달아주는 등의 사업을 벌였다. 십여 년 그런 활동을 해온 역사를 모아 「문화진흥회 십 년사」로 펴내기도 했다.
그런 활동을 해오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여러 부문에서 종사하다 은퇴하고 향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회를 맡아 첫 사업으로 기획하는 일이라며 나에게 한 주제를 맡아 달라며 원고를 내주면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할 것이라 했다. 원고에 무어라 쓸까, 궁리를 거듭했다.
우선 문화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말하고 지역 문화를 돌아보는 순서로 말해 보기로 했다. 우선 사회 구성원의 습득으로 공유되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인 문화의 개념을 말하고 문화는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역사성을 지녀야 하고, 그러자면 그 향수층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했다. 그것은 지역민의 역사의식의 문제점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문화는 개인적, 지역적, 국가적 특수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문화에 접하는 모든 집단과 영역에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확장성이 있을 것이며, 그러자면 문화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했다. 그다음으로 부침해온 지역 문화의 역사와 현황을 개관하고 문화 운동 단체로서의 ‘문화진흥회’의 할 일에 관한 논의로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하며 원고를 맺어 주최 측에 전했다. 내 원고는 각론이라기보다 총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며칠 후 패널들의 원고라며 편집하여 회원 공유 매체에 올려놓았다. 모두 여섯 사람의 원고가 실려 있는데, 내 원고가 두 번째로 편집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 원고는 모두 각론 성격이었다. 실무자가 책 편집 경험이 없는지 삽화도 제자리에 들어있지 않았다. 처음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내 원고는 총론적인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발표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삽화는 내용과 관련지어 제 자리에 넣어 달라고 했다.
토론회 날이 되었다. 면행정복지센터 회의실에 회원과 지역민들이 둥글게 배치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배포된 자료집을 보니 처음 편집된 그대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 번째 원고의 발표자는 비교적 고위직에 속하는 현직 공무원이고, 나머지 원고는 발표자 연령순으로 편집한 것 같았다. 내용보다 발표자의 사회적 지위를 먼저 고려한 것 같다. 주최 측 인식이 이렇다면 문화를 찾아가는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론을 먼저 말한 뒤 총론을 말하기가 어색했지만, 원고대로 이웃 지역 문화와 비교하면서 같은 시대와 산업 환경을 살아왔으면서도 그 삶이 역사로 남지 못한 것은 역사의식의 빈곤에서 기인한 것임을 역설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싶은 충정에서다. 행사를 주관한 사회자가 갑자기 시간이 다 되어 간다며 개입했다. 시간도 문제지만 지역에 대한 그 고언이 듣기 거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료집 편집할 때의 그 단세포적 인식의 그림자가 다시 비치는 듯했다.
패널의 발표가 끝나고 청중과의 토론에서도 역사로 남기지 못한 지역민의 삶을 두고 아쉬움을 털어놓기에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진행자 고지식과 비문화적 인식이었다. 어떤 집단, 사회든 리더의 인식, 이념이 구성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지역의 문화 운동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그렇지만,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어떤 역사든 항상 많은 이들의 소망대로 흘러왔다. 그 다중들은 항상 소망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 문화, 경제, 민주화가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지역의 문화도 그 발전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다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