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경북문화신문 |
|

▲오늘 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합니다

▲누군가에게 이 계단은 히말라야 산맥과도 같습니다
「젊은 도시 디지털 구미」가 언제부터인가「위대한 구미 찬란한 구미」로 바뀌어 있다. 서울에서 구미를 향해 내려 가다보면 가장 먼저 눈길이 잡히는 구미 도착을 알리는 표식이다. 철도보다 고속도로에서 더 잘 보인다.
도량동 팔각정이 서 있는 산 중턱에 새겨진 이 3음보의 글귀는 흰 빛의 고딕체로 채워져 있다. 이 전의 <젊은 도시····> 시절, 멀리서도 글자를 받치고 있는 투박한 철제 구조물이 보이고는 했다. 한동안 바래고 휘어져 방치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자칫 도시이미지를 그르치겠다는 조바심이 없지 않았다. 문구는 <위대한 구미····>로 바뀌었지만 철제의 투박한 구조양식은 그대로다.
문안은 대체로 슬로건에 가깝다. 왕래인에게는 각인의 효과를 내지인에게는 정서적 통합을 호소하고 있다. 나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서너 차례 구미를 다녀가는 고향 사람의 솔직한 감흥을 묻는다면, 촌스럽다. 투박하다. 좀 더 솔직할 것을 요구한다면 우스꽝스럽다! 라고 말하고 싶다.
왜 하필 나무를 뽑고 산을 깎아 새겼는가.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소를 찾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글귀는 반생태, 반녹색 무감각도시 <선언문>으로 읽힌다.
왜 하필 철제, 고딕체인가. 우리가 경험하는 디지털의 본성은 유연성, 다변성, 소통의 개방성과 지속성이다. 의식은 지금도 딱딱한 철기시대, 꽉 막힌 사각형 개발시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말로만 내 뱉는 IT, 디지털이라는 비아냥을 살 수도 있다.
왜 줄 곧 흰 빛인가. 아마도 글귀의 크기와 입지에 어울리는 가장 무난한 색채라는 평가를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단조로운 흰빛은 나날이 성장해 가는 구미의 역동성에 비추어 맥 빠진 보색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 입지는 꽤나 오래 동안 홍보 공간이었다. 지형을 복원 한다 해도 온전해 질 수 없을 만큼 훼손 상황이 너무 오래되었다. 막상 켐페인을 철거하고 나면 익숙해진 시민들이 섭섭해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한 곳은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한다면 대체장소 물색이 쉬울 리도 없다.
퇴락한 어촌의 담벼락이 아름다운 벽화로 다시 태어나 듯 <개발주의 슬로건>의 이 황량한 무표정을 <영감과 예지의 표정>으로 바꾸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난 2009년 무명의 지방지 <영남일보>가 일약 <지역신문컨퍼런스대상>을 수상했다. 대상은 그 한해 최고 신문제작 지방언론사에 수여하는 영예이다. 영남일보의 성공은 이제석이라는 세계적 아트디렉터에게 1면 최고가 광고지면을 무상으로 기증한데서 시작됐다. 이제석은 영남일보에 자신의 비영리 공익광고를 게재했고 신문은 찬사를 받았다.
이제석은 세계적인 아트디렉터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클리오 광고제’를 비롯해 ‘칸 국제광고제’ ‘뉴욕페스티벌’ ‘뉴욕원쇼페스티벌’ ‘영국 D&AD’ 등 해외유명 광고 공모전을 모조리 휩쓸었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구미시는 지금의 <무표정>을 철거할 생각은 없는가? 영남일보의 파격처럼 세계적 아트디렉터 이제석에게 지금의 홍보부지를 기증할 의향은 없는가? <이제석 zone>을 명명하고 그의 예술감성과 공익적 이상에 구미 땅 한 부분을 맡겨보면 어떻겠는가?
그로 인해 구미가 축복을 받지 않겠는가? <이제석>과 <감수성>과 최고의 지방 문화도시로서의 <명성>이 구미에 내리게 될 것이다. 혹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 하더라도 <이제석 zone>은 문화도시를 표방한 구미로서 손해 볼 일 없는 도전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