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 ⓒ 경북문화신문 |
|
큰일 났다. 강의실에서 나와 차를 몇 번 갈아 타고 집에 이르러 하루를 정리하려고 보니, 유에스비(USB)가 없다. 가방이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에서 흘려 버린 걸까. 예사 큰일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자료를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그게 뭐길래 나를 이리 무력하게 만드는가.
강의실에서 컴퓨터에 꽂아서 쓰면서 강의를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온 길을 되짚어 봐도 길에서 흘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꽂아 쓰고는 그냥 두고 온 게 분명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고. 누가 보고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몸에 진땀이 나면서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날이 새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강의실 문 열릴 시각을 맞추어 다시 차를 몇 번이나 바꾸어 타고 달려갔다. 심장이 아주 바쁘게 뛰었다. 드디어 강의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올라가 강의실 문을 급하게 열었다. 전자교탁 안 컴퓨터를 보니, 내가 꽂아 놓은 대로 달려 있었다. 몇십 년 이산가족을 상봉한 듯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유에스비를 뽑아 다시 만져본다. 이게 나에게 무엇인가. 내가 지금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 속에는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서 자료들, 예컨대 일기장이며 글쓰기 작품, 작품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들, 강의를 비롯한 모든 활동에 필요한 자료들이 곱다시 다 들어있다. 내 정신세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곧 이것이다. 아니, 나보다 훨씬 낫다. 내 정신을 갈무리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나라는 이 육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을 이 작은 것이 해내고 있다. 내 육신이란 이리 무능한 존재인가. 이것을 컴퓨터에 꽂아 놓았다는 사실도 기억 못 하고 잊어버려 이리 소중한 것을 그냥 두고 다니다니. 내 육신과 그 능력에 대한 회의감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이 작은 물체 하나보다 못한 이 육신을 내가 지니고 살아야 하는가. 지닐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런 육신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맛난 걸 먹으려 하고, 멋진 옷을 입으려 하고, 편안히 뉠 자리를 찾는단 말인가. 내 모든 정신세계는 이 작은 것에게 맡기고, 나는 거저 빈 머리로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들, 그런 것들은 내가 눈을 감거나 시간이 흐르면 다 사라져 버리는 데 비해 이 조그만 것은 내 정신세계를 아주 오래도록 갈무리해주지 않는가. 돌이켜 볼수록 육신에 대한 실망감이 소용돌이친다.
나는 지금 요통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몇 곳 병원을 옮겨가며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몸 어디 한 곳이 옳지를 못하니 모든 움직임에 자유롭지 못하고 힘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의욕도 떨어지면서 마음조차도 약해지는 것 같다. 몸이 아픈 것 이상으로 마음도 힘들어 사는 일이 고달프게 느껴진다.
치료를 받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통증이 좀 덜해졌다가 다시 더하다가 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통증이 덜할 때는 몸이 좀 가벼워지면서 마음도 따라 가벼워지는 것 같다. 통증이 또 심해지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정신도 고통스러워지는 것 같다. 육신과 정신, 몸과 마음은 하나란 말인가.
치료를 열심히 받아야겠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의 해방감을 위해서라도 치료를 충실히 받아야 할 것 같다.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는 불경에서 밀란다왕과 나가세나 존자가 주고받는 문답 중에, 전쟁에서 몸을 다쳐 상처가 났을 때 약을 발라 싸매는 까닭은 상처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빨리 낫게 하려고 약을 발라 보호한다.’라는 문답이 나온다.
몸도 그런 것 같다. 몸 자체가 소중해서라기보다는 정신을 싸안고 있는 몸을 잘 지킴으로써 심신을 다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육신과 정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몸이 아파보니 절실히 느낄 수가 있겠다. 육신도 정신도, 몸도 다 소중한 나의 것임을 새삼스레 새기며 유에스비를 다시 들여다본다.
내 몸이 아니었다면 유에스비에 내 정신을 어떻게 담을 수 있었겠으며, 내 정신이 아니면 거기에 담을 거리를 어떻게 생각해 낼 수가 있는가. 내 능력으로 다 담고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다 담아 주니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몸이 있어야 정신 작용도 이루어지고, 정신 활동이 이루어져야 몸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작은 것을 보며 다시 깨닫는다. 몸도 마음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게 아니라는 것을-.
육신과 정신이 하나 되어 살고 있고, 하나 되어 살아가야 할 우리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