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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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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승부는 과학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도예공들의 청자가 누가 보더라도 비색에 더 접근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청자 비색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노력으로 초기 고려청자와 청자의 발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월주요 청자, 상감청자의 태토와 유약을 비교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역대 월주요 청자의 태토에서는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나 강진의 청자에서는 0.04%~0.05% 소량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유약의 경우도 초기청자에서는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나 상감청자에서는 0.89%, 월주요에서는 1.7%나 함유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비취색의 상감청자는 태토와 유약 모두에 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이 청자의 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청자의 색은 유약뿐만 아니라 가마의 온도, 불 때는 연료, 소성 방식 등 여러 가지 요소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인이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색깔을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고려청자는 많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흙과 불의 조화이지만 그 비밀은 아직도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청자의 비취색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엄밀한 고증과 현대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100% 비색(秘色)을 재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상감청자(象嵌靑瓷)
청자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을 상감청자라 하며 바탕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그 패인 홈을 회색의 청자 바탕흙 또는 다른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표면을 고른 후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청자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구워내면 회색을 바탕으로 흑, 백의문양이 선명하게 돋보이게 된다. 이는 우리 나라가 최초로 도자기에 응용한 방법으로써 매우 독창적이다. 상감청자는 고려인의 창의로써 이루어진 독보적인 자예의장이다. 상감기법에는 정상감과 역상감의 두가지가 있는데 정상감은 앞에 이야기 한 방법으로 상감무늬를 나타낸 것이며 역상감은 이와 반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 이외의 여백을 파고 백토나 자토로 상감하는 방법이다. 상감기법은 청공기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낸것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 청자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내기 시작한것은 대략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가장 세련미를 보인 시기는 12세기 중엽무렵이며 특히 1159년에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청자는 정교한 기법과 짜임새 있는 문양의 구도 맑고 투명한 유약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절정기 상감청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감청자는 1231년 몽고 침입이후 서서히 퇴락하여 문양이 도식화 되어 버린다.
고려 말에는 보다 간편하게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늬를 찍어내는 인화기법까지 생겨나며 상감청자의 인화기법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된다.
분청사기(粉靑砂器)
분청사기란 분장회청사기의 준말이다.
분장회청사기란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고유섬에 의해서이다.
분청사기란 제작되던 당시의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옛 문헌에서 분청사기와 같은 종류의 도자기를 무엇이라고 자칭하였는지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분청사기는 퇴락해 가던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발생한 것으로서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가 일변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한 것이 바로 분청사기이다.
그리하여 세종대에는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그 절정기를 이루어 조선 도자 공에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였다.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관요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생산량이 줄고 소규모화 하여 가다가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생산이 거의 끝난다.
그러므로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 발생으로부터 16세기 중엽경까지 약 200여 년간 생산되었으며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서는 가장 분박하고 민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분청사기는 우연한 시대 산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사회문화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분청사기는 토산공물로서 중앙에 상납되었기 때문에 특히 관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 많고 관사명이 새겨 있는 그릇은 일상 및 관아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우수한 분청사기가 제조되던 15세기 전반 즉 세종대에는 중국의 명나라 백자를 닮으려고 노력한 흔적은 문헌 기록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국적으로 분청사기 가마터가 확산되어 서민층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고려청자의 중요 생산지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며, 이 두 곳은 국가의 강력한 구제와 보호를 받는 관요적인 성격을 띠었던 곳이고 15세기 후반에는 조선의 관요인 경기도 광주에서 백자와 청화백자를 제작했으나 분청사기만은 어느 일정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고려말 조선 초에 걸쳐 정치의 불안, 관기의 문란, 신분층의 와해, 새로운 지배세력의 성장, 왜적의 침입 등으로 관요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들 기술자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상감청자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국가의 규제 없이 자유로이 제작할 수 있었으므로 분청사기가 활달하고 구김살 없는 자유분방한 멋을 풍기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였으리라고 본다.
분청사기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분장기법과 무늬이다.
분장 기법이란 그릇에 정선된 백토를 씌우는 즉 백토분장을 말하며, 백토분장의 방법과 분장 후에 어떻게 무늬를 표현하느냐에 따라 분청사기는 몇 종류의 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장영도 옛생활문화연구소 소장/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