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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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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3일이 처서(處暑)다. ‘더위를 물리친다’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처서기간이 되면 신기하게도 무더위가 가시고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이른 가을 기운마저 느껴진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익살스런 옛 속담대로 서늘한 기운 탓에 여름 내내 극성스럽던 모기들도 어느새 종적을 감춘 것 같다.
이 무렵 농촌은 비교적 한가한 시기이지만 농사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막 벼의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무렵이라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해 농사의 풍흉을 결정짓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이 시기에 벼가 제대로 익지 않으면 풍작을 기대하기 힘들다.
요즘 아이들은 벼농사를 어떻게 짓는 지조차 낯설 것이다. 벼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삭 패기가 뭔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는 '벼의 한 살이' 과정이 있다. 게다가 단골 시험문제로 출제되기 때문에 무조건 암기부터 하지만 벼농사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터라 막상 시험지를 받아들면 아리송해 진다. 벼의 한 살이 과정의 정답은 "씨앗심기-싹트기-모내기-이삭 패기-꽃피기-이삭 익기-새로운 볍씨" 순이다.
처서는 '이삭 패기'가 시작되는 무렵으로 보면 된다. 가을로 접어들 때이긴 하나, 한낮의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쬘수록 벼가 알차게 익는 시기다. 그래서 다름 아니라 가장 우려되는 것은 '비'다. 이맘 때 내리는 비를 '처서비'로 부르는데, 처서비가 오면 십리에 천석을 감한다고 할 정도로 농사에서는 흉작을 면치 못하므로 타격이 크다. 당연히 처서비야말로 반갑지 않은 존재다.
'이삭 패기' 때 제대로 맑은 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받아야만 나락이 입을 벌려 다음 단계인 '꽃피기'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고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해 썩기 때문이다. 처서를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아이들의 성장판이 열려있는 시기에 비유하면 될 것 같다. 이 시기에 영양과 운동이 아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처럼 햇살과 바람이 성장의 거름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이치가 묘하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다를 것 없이 한창 자라야 할 시기가 있다. 이 때 쑥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인 모든 게 맘먹은 대로 모든 게 되지는 않는다. 돌발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인간사에도 '처서비'는 불현듯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처서에 뜨거운 햇볕을 갈구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처서가 지나면서부터는 차츰 햇볕이 누그러진다. 따라서 처서가 지나면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 무렵이면 산에 올라 벌초를 하는 게 옛 풍습이다. 벌초 뿐 아니라 밭의 풀을 베고 피도 뽑고 논두렁의 풀베기 등에 일손이 분주한 계절이 바로 처서이다.
처서의 볕이 좋다는 점에 착안해 여름동안 눅눅해진 옷들과 이불을 내어다 말리는 풍경을 요즘에도 종종 볼 수 있다. 장마철 습기를 가득 먹은 책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듯 24절기에는 농경시대를 살아온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현대인들도 응용해 봄직한 유용한 팁도 적지 않다.
처서와 관련해서 종종 회자되는 것 중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는 말이 있다. 마치 시구처럼 가을로 접어드는 풍경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말이다. 오늘 따라 하늘이 더 높아 보이고 뭉게구름도 솜사탕처럼 예뻐 보인다. 부디 짓궂은 처서비는 잠시 쉬었다 가는 볕 좋은 날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