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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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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국가에는 대한민국의 지도가 있으며, 고을에는 고을의 지도 즉 그림이 있는 것인데, 고을지도가 수령에게는 매우 절실한 것이라고 말하고, 선대의 고향땅 선산에 근무하는 것이 영광이고, 나의 분수에 이미 넘친다고 하며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생각을 거듭한 결과, 고향 부로들의 소망에 보답하는 것은 오직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데에 있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은 오직부적을 밝히는 데에 있으므로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산천과 마을, 창해와 원역을 한 폭에 모두 그리게 하고, 호구, 간전, 도리의 숫자 또한 각 마을 밑에다 기록하게 하여 고을 백성을 잘 다스리었다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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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부 지도 |
-선산지도(善山地圖)에 기록하다-
여지(輿地)에 그림이 있는 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이다. 천하(天下)에는 천하의 그림이 있고, 일국(一國)에는 일국의 그림이 있으며, 일읍(一邑)에는 일읍의 그림이 있는 것인데, 읍도(邑圖)가 수령(守令)에게는 매우 절실한 것이다. 대체로 그 산천(山川)의 동서남북의 길이와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과 개간한 토지의 남고 모자람과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을 여기에서 상고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데 있어 조용조(租庸調)를 균평하게 매겨 받아서 관가(官家)를 받들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선산(善山)의 땅은 강(江)의 동서쪽을 걸터앉아 있어 종횡(縱橫)으로 따져보면 거의 100여 리가 되고, 크고 작은 방촌(坊村)으로 호칭된 것들이 모두 50여 개나 되므로, 신라(新羅) 이후 대대로 대읍(大邑)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답이 날로 개척되고 인구(人口)가 날로 번성해져서, 매년 재부(財賦)의 숫자가 상주(尙州), 성주(星州)와 서로 맞먹고 있다. 그러므로 수령된 사람이 만일 잘 헤아리고 단속하지 못하면, 호강한 종족(宗族)이나 교활한 아전들에게 속고 숨김을 당하지 않을 자가 적을 것이니, 백성들의 피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김종직(金宗直)은 선산부(善山府) 사람이지만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1476년(성종 7)에 승핍(承乏)으로 선산부사가 되어 외람되이 이민(吏民)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부귀(富貴)하여 고향에 돌아간 영광이 나의 분수에 이미 넘치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생각을 거듭한 결과, 고향 부로(父老)들의 소망에 보답하는 것은 오직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하는 데에 있었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은 오직 부적(簿籍)을 밝히는 데에 있으므로, 부적을 이미 대략 밝히었다. 그리고는 또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그 산천(山川)과 마을, 창해(倉廨)와 원역(院驛)을 한 폭(幅)에 모두 그리게 하고, 호구(戶口), 간전(墾田), 도리(道里)의 숫자 또한 각 마을 밑에다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표가 다 이루어지자, 이를 황당(黃堂)의 벽에 붙여 놓게 하고 보니, 한 고을의 봉역(封域)이 환하게 모두 안중(眼中)에 들어왔다. 앞으로는 매양 세금을 매겨 거두거나, 인력(人力)을 징발할 적마다 먼저 그 부적을 상고하고 다음으로 이 도표를 상고하여 백성들의 생활 형편을 아울러 재량한다면 거의 우리 백성들은 일분(一分)이나마 은혜를 입게 되고, 호강한 종족이나 교활한 아전들은 그 사이에 부정한 짓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감히 이것을 영구한 규정으로야 삼을 수 있겠는가.
1477년(성종 8) 가을 9월에 부사(府使) 김종직(金宗直)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