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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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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명재 윤증선생이 신창현감 김우집이 청송 성수침의 진적을 가지고와서 글 아래 발문을 써주었으면 하고 부탁하였으나, 소인이 감히 한마디 붙일 수가 없어서 한 달 가량 감상하다가 되돌려주면서, 모사본은 많이 보았으나 진본과는 너무나 차이가나서 선현들의 글씨는 점이나 획은 모사가 가능해도 정신은 모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며, 또 서계 박세당선생은 성수침의 글씨는 세상 사람들이 보배로 여기며 서법은 원 나라 조맹부로부터 나왔으며 손에 넣으면 잠깐도 놓기 싫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말하고 그러나 너무 좋아하여 명류의 풍치로 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고 말했다.
-성수침(成守琛)이 손수 쓴 묵적(墨跡)의 발문-
명재(明齋) 윤증(尹拯)
충청도 신창현감(新昌縣監) 김우집(金宇集)이 묵첩(墨帖)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바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이 손수 쓰신 글씨였다. 지금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해로부터 따져 보면 140여 년이 흘렀는데, 삼가 그분이 남기신 자취를 직접 음미하게 되니 감동스럽고 그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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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당 성수침의 필적’ |
김우집(金宇集) 군이 그 아래에 글을 쓰라고 하였으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삼가 한 달을 곁에 두고 받들어 음미하다가 돌려주는 바이다. 내 일찍이 간행된 모사본(摸寫本)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진본(眞本)에 비해 볼 때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것은 아마도 점이나 획은 모사할 수 있어도 거기에 깃든 정신은 모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옛사람들이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을 귀하게 여긴 이유이다. 아, 어찌 글씨뿐이겠는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글씨는 세상 사람들이 보배로 여긴다. 그러므로 글씨를 소장하는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지 못하면 그 책을 빛낼 수 없었다. 그의 서법은 본래 원나라 오흥출신의 서예가 조맹부(趙孟頫)로부터 나왔는데, 미려함은 본디 조맹부(趙孟頫)만 못하지만, 기일(奇逸)하고 탈속(脫俗)함으로 말하면 조맹부보다 오히려 낫다고 하겠다.
이 서첩(書帖)은 필세가 초일(超逸)하고 의사가 고아(高雅)하니,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문장과 서로 걸맞다 할 것이다. 이 두 분이 아니라면 이러한 문장이 나오지 못하고 이러한 글씨도 나오지 못할 것이니, 참으로 고인(高人)과 정사(正士)는 고금의 차이 없이 취미가 서로 계합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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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당 성수침의 필적’ |
신창현감(新昌縣監) 김우집(金宇集)이 이 서첩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고 발문을 부탁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이를 얻는 데 몹시 힘이 들었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글씨를 수집하는 것은 글씨를 몹시 좋아하여 서벽(書癖)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지 못하면 비록 좋아는 할지라도 반드시 수집까지 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지금 더구나 이 서첩은 정말이지 손에 넣으면 잠깐도 놓기 싫을 정도로 소중하니, 김우집이 이를 구하려고 갖은 어려움을 마다 않고 힘을 쏟은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지나치게 애써 구하다 보면 그 정도(正道)를 잃을 수도 있으니, 예컨대 소익(蕭翼)이 지영 선사(智永禪師)를 속인 일과 같은 것은 또 경계로 삼아야지, 명류(名流)의 풍치(風致)로 여겨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김우집같이 어진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까지 할 우려가 없을 줄로 믿는다. 김우집을 몹시 아낀 나머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고, 또 근세에 자못 이러한 유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울러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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