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상모(上毛)란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그런데 사용된 용례(用例)가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어렵게 찾은 기록은 겨우 다음의 2개 뿐이다.
上毛 測量
大韓每日申報 1909년 1월 8일 1면 5단
慶北 善山郡 下古尾面 上毛洞 有志 紳士 諸시가 該 洞內에 測量學校 設立고 학徒 四五十名을 募集야 敎師 元優壹씨가 熱心 敎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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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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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봉건시대에서 근대의 초기로 접어드는 20세기 초에 구미시 개화 인사들의 근대교육에 대한 열기는 ”상모교회 백년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모측량학교와 상모교회의 근대식 학교 운영은……상모교회가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가는 어려운 시기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어린 학생들을 근대교육으로 개화하고 자주정신을 가지도록 힘썼다는 것으로 한국 교육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 상모측량학교는 1909년 이후에 이르도록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정확한 기록들을 찾을 수 없다. 이때 상모측량학교의 교사진은 다음과 같다.
교장: 정인백(鄭寅伯), 교사 원우일(元優壹) // (상모교회백년사, 26쪽에서 인용)
교사 원우일은 1909년 농상공부 기수(技手)에 임용된 개화 인물이며 비슷한 시기에 순희(純喜)로 개명(改名)한 뒤에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에서 활동하였다. 교장 정인백은 상모교회의 첫 신자로서 일찍부터 위암 장지연 선생과 교류한 인물이다. 특히 첫 신자 정인백은 처음 동학(東學)의 교도였는데, 체포를 피해 고향 마을인 상모를 떠나 멀리 도망 다니다가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를 만나면서 기독교를 신앙하게 된 드문 경력의 인물이다. 정인백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실도 황성신문의 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敎訴 校獘
皇城新聞 1906년 7월 24일 2면 4단
●敎訴 校獘
慶尙北道 耶蘇敎徒 《鄭寅伯》 等이 學部에 請願기를 自敎中으로 方起 敎育이거날 不意 近日에 各 郡守가 稱 以 私立學校고 或 捉囚 敎民며 勒討 錢財야 如 不 即納이면 威脅 萬狀이고 勒招 外村 敎民야 强入 邑校니 相拒 數三十里에 齎粮 留學이 亦係 困難더러 况 旣有 自校어날 何必 勒入 邑校 乎아 號訴 冤情며 說明 理由되 牢拒 不聽고 壓制 强迫을 不勝와 玆 以 仰訴오니 嚴訓옵셔 俾勿 侵討케라 얏더라
상모교회의 첫 신자 정인백이 경상북도의 기독교 신자들을 대표하여 당시 한양으로 올라가 경북지역의 교회 내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를 존중해 달라는 상소를 고종황제께 올렸다는 내용이다. 1906년 상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로 간 정인백은 장지연을 만나게 되었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중앙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會員名簿
대한자강회월보 제10호 1907년 4월 25일 발행
會員名簿
入會 認證을 領有하야 會員資格이 完全 人만 揭載홈.
宋晙燮 李奎學 黃宗南 朴海胤 李完龜 卞鍾獻 金殷基 林允玉 孫致鳳 許枓 《鄭寅伯》 尹泰鉉 盧相夔 金貞鉉 徐丙炎 張基薛 韓基準 李禧榮<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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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암 장지연 초상화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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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上毛)로 명확하게 표기된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위암 장지연 서간집》 3권 1231번에 수록된 편지가 있다. 이 글은 1916년 음력 9월 3일 임은동의 허헌(許*土+憲, 이하 편의상 憲으로 표기)이 위암 장지연께 보낸 편지이다. 이때 장지연 선생은 마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허헌은 어떤 인물인가. 다음의 황성신문 기사에서 확인되듯이 “허헌(許憲, 1858~1937)”은 하구미에서 1907년의 국채보상을 이끈 역사적 인물이다. 허헌은 임은동 출신의 뛰어난 유학자로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실학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제자들에게 전수(傳授)하신 선각자 방산 허훈(許薰, 1836~1907)의 제자이며, 위암 장지연과는 소년 시절부터 일생을 절친(切親)으로 지낸 사이이기도 하다.
●善山 善人
皇城新聞 1907년 4월 15일 1면 2단
善山郡에셔 許한【土+憲】氏 等이 國債報償하기 爲하야 廣告文을 發佈하얏더라.
서간집에 수록된 편지의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략) 近年以來 鄕隣 長德 次第 星落 而 鄙村 上派 諸族 俱入 西島 村落 尤極 荒涼, 上毛 性行 喪人 生事 益落 尙 不 永窆 見之 悶然(이하 생략)
丙辰 9月 3日, 弟 許憲 拜謝
번역: 근년 들어 이웃 마을에 사는 후덕한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우리 마을에 살았던 김해허씨 큰집의 여러 친척들이 모두 사들인 서간도(西間島)의 촌락은 더욱 황량합니다. 상모 사는 지금 상을 당하신 성행(性行) 씨는 사는 형편이 더욱 몰락하여 아직도 고인의 묘소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위의 편지를 1916년 위암 장지연에게 보낸 허헌(許憲)의 자는 윤화(允華), 호는 아환(亞寰)이다. 허호(許澔, 1940~) 전 구미시의회 부의장은 이 어른의 손자가 된다. 허복(1960~) 현 도의원 또한 이 집안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상모동 주민 여러분, 상모동 용례(用例)가 작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914년 7월 15일 있었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상모사곡동은 구미면 상모리(上毛里)와 사곡리로 개칭되었는데, 이때부터 호적부와 등기부 등본, 토지대장 등본 등의 각종 공부(公簿)에는 상모(上毛)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편지와 일기, 여타 개인 기록에도 상모(上毛)라는 지명이 두루 사용되었으니 근대식 행정이 실시되면서 상모(上毛)는 이 마을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보급되었던 것이다.
상모동에 거주하는 토박이 주민들은 모래실이나 사곡(沙谷)보다는 모로(慕魯)에 상모(上謀)나 상모(上毛)보다는 상모(上慕)에 꽂혀 있다. 이런 현상은 동회의 명칭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사곡동과 상모동에는 동계(洞契)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족히 2백 년은 넘을 법한 오래된 동회(洞會)가 있다. 그런데 상모동은 “모로실회”라 하고, 사곡동은 “모래실회”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곡동과 상모동 사이의 동회 명칭에 대한 구분은 사실 근거가 빈약한 상모동 토박이 주민들의 심정적인 애착(愛着)으로 이해해도 좋을 법하다.
조선 초기의 단종 때에 귀양 왔다가 이곳에 은거하여 오직 어린 임금에 대한 의리로 생애를 마친 백효연(白效淵)이야 《모로(慕魯)》라는 마을 이름에서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사모하는 마음을 느꼈을지 모르겠으나 “모로”는 그저 모래가 많은 지형의 특성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여러 차례 고증(考證)한 바가 있다.
수원백씨 족보에 실린 백효연(白效淵)의 행적을 살펴보자. 1453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였다. 당시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낸 백효연(白效淵)이 이에 항의하여 낙향하자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징소(徵召)하였고 백효연은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결국 인동(仁同) 또는 선산(善山)으로 유배(流配)되었고, 뒷날 귀양에서 풀려나서도 지금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와 나란히 붙어 있는 백운재(白雲齋)가 있는 바로 뒷산에 은거해 살았다. 위암 장지연 선생이 쓴 “모로동기”에 나오는 《백씨총(白氏塚)》이 바로 백효연이 은거해 살았던 곳이며, 지금은 그 장소에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백효연의 후손들은 증손자인 백치거(白致琚)에 이르기까지 몇 대를 상모사곡동 지역에서 살았다. 백치거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하로 중종 때 진사가 되었으며, 어릴 때부터 문학과 덕행이 있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자 학업을 폐하고 강호(江湖)에 은거하였다. 후인들이 그가 낚시하던 곳을 백진사탄(白進士灘)이라 이름 지었다. 관련 기록이 『국역 칠곡지리지』에 있다. 《백진사탄》은 어디쯤일까. 구미 1공단의 모든 폐수가 모이는 임은동 앞의 저수시설이 있는 지점의 낙동강 유역이 바로 “백진사탄”이다.
지금 구미시 사곡동 노인정 인근에 마을 사람들이 “진동산”이라 부르는 곳에 최근까지 백씨들의 무덤 몇 기가 남아 있었다. 진동산에는 수령(樹齡) 100년은 족히 넘는 소나무 십여 그루가 우뚝하였는데,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아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소를 놓아 방목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늦은 봄에서 여름을 거쳐 늦은 가을까지 개구쟁이 마을 아이들은 묘소 사이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배를 깔거나 그렇지 않거나 천연스레 무덤을 오르내렸고, 숨바꼭질이나 씨름을 하면서 하루를 지새우는 그런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백씨들의 무덤은 1990년대까지 몇 기가 남아 있었으나 2000년대 초에 마무리된 사곡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면서 어디론가 옮겨 갔다.
구미시에 제안한다. 상모사곡동에서 이루어졌으면서도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유서 깊은 옛 역사를 기려 상모사곡동에 조성된 소공원의 명칭으로 “백효연 공원”, “백치거 공원”, “유태화(柳泰華) 공원”으로 명명(命名)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이를 계기로 지난 세월 선산군의 변방으로 그저 치부(置簿)되었던 상모사곡동이 실은 오래전부터 뿌리 깊은 연원(淵源)을 가진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지역 주민들과 구미 시민들 사이에 널리 소개되기를 한껏 기대해 본다.